‘꿀벅지’ 개드립(개소리+애드리브 ) 딸한테도 날릴래?
▲ OCN에서 방영됐던 <직장연애사>. |
아무리 농담으로 했다지만 일단 피해자가 불쾌감과 수치심을 느끼면 성희롱으로 간주된다.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하기에는 ‘세 치 혀’가 주는 상처는 적지 않다. 오랜 시간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규모가 크지 않은 무역회사에 다니는 S 씨(여·25)는 같은 총무팀 과장이 눈엣가시다. 처음에는 웃으면서 넘긴 농담들이 이제는 듣기만 해도 징그럽다.
“저희 회사는 총무팀 여직원만 유니폼을 입어요. 회사에 오는 외부 고객들 접대할 때 주로 총무팀에서 차를 내가는데 그때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차를 내가야 있어 보인답니다. 여기까진 참겠는데 입사하고 처음 유니폼을 입었을 때 총무팀 과장이 ‘어, 다리 예쁜데!’ 하더군요.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칭찬이려니 하고 넘겼죠. 그런데 그 뒤로도 ‘치마가 딱 붙어서 꿀벅지가 보기 좋다’ ‘역시 다리 하나는 예술이다’ 등 시답잖은 농담을 계속 하는 거예요. 지나갈 때마다 대놓고 훑어보는 것도 너무 싫고요. 정말 짜증나는데 윗사람이라 한 소리도 못하겠고 되도록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해요.”
교육 관련 회사에 다니는 M 씨(여·28)도 며칠 전 부장한테 들었던 말만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뒤집어엎을까 말까, 그날 하루 종일 고민했었다고.
“뭘 잘못 먹었는지 그날따라 계속 장이 꼬이고 배가 아프더라고요. 찡그린 표정으로 배를 부여잡고 앉아 있는데 부장이 다가오더니 실실 웃으면서 ‘××씨, 왜 그래? 생리 중인가봐?’ 이러는 거예요. 그냥 어디 아프냐 하면 좀 좋아요. 듣는 순간 기분이 확 상하더군요. 그때 저도 웃으면서 ‘그런 말 합의금 3000만 원인 거 아시죠?’ 이렇게 받아치는 건데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했어요. 지금 생각하니까 후회되네요.”
말을 넘어서 행동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성희롱을 넘어 성추행이 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대부분 회식 중에 일어나는 일이라 즉각 대응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디자인 관련 일을 하는 K 씨(여·30)도 회식 중에 황당한 일을 겪었다.
“주변에 있는 친구들한테 업체 접대 자리에 여직원 대동하는 회사도 많고 일하면서 슬쩍슬쩍 스킨십을 시도하는 상사들이 꽤 된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뭐 그런 사람들이 있느냐고 흥분했었는데 실제로 제가 겪으니까 정말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회식 때 옆자리에 있던 상사가 계속 치근대더니 갑자기 가슴을 만지는 거예요. 순간 얼음이 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다가 정신 차리고 얼른 그 자리를 떴는데요.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쿵쾅거리네요. 그 자리에서 발끈했어야 했는데…. 당한 사람만 억울한 거죠.”
K 씨는 그 뒤로 따로 연락을 해 오는 상사 때문에 상당히 곤란하다고 호소했다. 무시하자니 회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라 뒷감당이 안 되고, 연락에 응하자니 ‘Yes’의 뜻으로 알까봐 걱정이라고.
L 씨(여·28)도 얼마 전 회식자리에서 깜짝 놀랄 일을 겪었다. IT 관련 업체 직원인 L 씨는 사무실 분위기도 화기애애하고 성격도 털털해서 평소 성희롱은 남의 일로만 여겨졌었다.
“평소에 업무적으로도 도움을 많이 주신 상사 옆자리에 앉았고 앞에는 선배 분이 있었죠. 그런데 상사분이 많이 취하셨는지 갑자기 제 볼에 입을 맞춘 겁니다. 술을 따르던 저랑 앞의 선배는 너무 놀라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는데 ‘취해서 그런 거겠지’ 하면서 그냥 넘어갔어요. 그런데 이후에 계속 생각나고 기분 나쁘더군요. 성희롱, 제가 실제로 겪으니까 참 찝찝하네요.”
성희롱은 대부분 남성에 의한 여성들의 피해가 많지만 남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희롱’에 관한 한 남녀가 따로 없다는 것이 C 씨(30)의 생각이다.
“첫 직장에서 했던 업무가 영업하는 분들 관리였어요. 영업하시는 분들은 주로 여성들이고 결혼하신 분이 대부분이었죠. 제가 성격이 서글서글해서인지 절 예뻐하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나이가 좀 있는 영업 직원분이 뒤에서 절 안더니 가슴을 살짝 움켜잡더라고요. ‘아, 왜 그러세요!’ 하고 제가 한마디 하니까 ‘나도 영계가 좋아’ 이러면서 오히려 웃으시더군요.”
C 씨는 그 뒤로도 상습적으로 ‘총각이 좋다’는 표현을 하면서 엉덩이를 치고 가는 그 영업직원 때문에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고. 그는 “처음부터 정색을 하고 ‘NO!’라고 했었어야 하는데 웃으며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고 털어놨다. 외식업체에 근무하는 H 씨(32)도 20대 중반 때 전 직장에서 상사 때문에 크게 상심했던 적이 있다. 막내였고 성격이 다들 좋아서 친형제처럼 지냈던 터라 실망이 컸다고.
“하루는 40대인 상사분이랑 권투하는 흉내를 내면서 점심때 휴식 겸 놀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제 아래를 꽉 잡으시는 겁니다. 너무 놀라서 불같이 화를 냈어요. 아무리 남자들끼리 하는 장난이지만 회사에서 너무하는 거 아니냐고 하면서요. 상사분이 미안하다고 했지만 기분이 영 안 좋더군요. 제가 유아 시절 동네 할아버지에게 성추행을 당한 일이 있어 그런지 상처가 더 컸던 것 같아요. 서로 푼다고 풀었는데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그 상사와는 좀 껄끄러웠습니다.”
얼마 전 한 인사포털이 직장 내 성희롱에 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남녀 직장인 549명 중 절반에 가까운 47.5%(261명)가 성희롱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여성들은 75.9%가 성희롱 경험이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경험이 일회성이 아닌 지속적으로 이뤄진다는 답이 60% 이상으로 압도적이었다는 점. 대기업에 근무하는 B 씨(34)는 “직장 내 성희롱은 진지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당한 사람은 계속 그 회사를 다녀야 하고 가해자는 윗사람일 경우가 많기 때문”이라며 “터트려봐야 본인만 손해라는 생각이 많아 아무리 성희롱 교육을 해도 개선 속도가 느린 것이 직장”이라고 지적했다.
아무 생각 없이 장난치다가 3000만 원 합의금을 한 번 내봐야 ‘아~! 성희롱이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라고 정신을 차릴 법한데 아직 용기 있는 직장인들이 그리 많지 않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