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현대차 통해 전기차 핵심 ‘전용 플랫폼’ 확보 가능…현대차, 플랫폼 대량 생산 기회지만 위탁 방식 우려도
자동차는 발명 이후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내연기관 엔진을 장착한 기계장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진화는 거듭했지만 혁신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최근 자동차 업계는 자율주행을 결합한 전기장치로 전환하는 대변혁을 맞고 있다. 압도적인 시장 지배자가 없는 가운데, 전자제품의 두뇌역할을 하는 고도화된 운영체제(OS) 및 시스템과 손발이 되는 하드웨어를 완성도 높게 생산해내는 곳이 게임 체인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은 전자에, 현대차는 후자에 강점이 있다. 양측의 협업 현실화 가능성이 세계적 관심을 받는 이유다.
서울 서초구 현대자동차 본사. 사진=최준필 기자
애플의 전기차 사업 진출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회사가 직접 ‘차를 만들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단 한 차례도 없다. 개발 이슈가 처음 수면 위로 떠오른 것도 2015년 미국에서 한 전기차 배터리 제조업체와 벌어진 소송전 때문이었다. 이 제조업체는 애플이 회사의 핵심 엔지니어를 불법으로 빼내 기술을 훔쳐갔다며 법원에 소송을 냈다. 시장에서는 애플이 전기차 배터리 인력을 채용한 것을 두고 본격적인 개발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당시 애플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이후 수년이 더 지나서야 애플이 2014년부터 ‘프로젝트 타이탄’이라는 이름으로 전기차와 관련된 기술 개발 작업을 추진해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애플의 CEO(최고경영자) 팀 쿡이 프로젝트를 승인했고 포드 엔지니어 출신 자데스카 부사장이 팀을 이끌었다. 앞서의 전기차 배터리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다임러, BMW 등 전통적인 자동차 회사에서도 인력을 대거 채용했다. 테슬라 모델S 개발의 핵심 인력이었던 더그 필드 테슬라 부사장이 애플에 입사하고, 이후 엘런 머스크 테슬라 CEO가 격노했다는 것은 자동차 업계에서 유명한 일화다. 다만 애플은 최근까지 프로젝트와 관련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애플이 전기차를 자체 생산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 시장의 분석이다. 전기차 혁신의 핵심으로 통하는 자율주행 기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팀 쿡은 2017년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자율주행은 가장 중요한 핵심기술이고 가장 어려운 AI(인공지능) 프로젝트”라고 언급했다. 최근엔 최신 스마트폰 기종인 아이폰12에 라이다(LiDAR) 스캐너를 처음 탑재했다. 물체를 향해 레이저를 쏜 뒤 부딪혀 돌아오는 데이터를 계산해 물체의 양감을 측정하는 이 센서는 자율주행 전기차 기술의 핵심 장비다.
그 밖에 애플은 운행 중 멀미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증강현실 디스플레이, 사람의 신체 부위와 햇빛 등을 고려해 최적의 차내 온도와 공기를 유지하는 장치, 환경 변화에 맞춰 달라지는 차 유리 틴팅 변환 장치 등 자동차와 관련한 특허를 다수 가지고 있다. 자율주행 솔루션을 개발하는 한 IT 업계 관계자는 “주행 중 ‘운전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동시간은 이용자가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사적시간이 된다. 콘텐츠 소비를 비롯해 이 시간을 통해 생기는 부가가치가 상당하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던 자동차가 아닌 전혀 다른 공간이 되는 것”이라며 “아이팟, 아이폰, 애플TV의 핵심은 소프트웨어고, 애플은 이를 통해 기존 개념을 바꿨다. 새로운 진화의 경로로 자율주행 기술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애플은 2014년부터 ‘프로젝트 타이탄’이란 이름의 전기차 관련 기술 개발 작업을 진행했다. 애플의 CEO 팀 쿡. 사진=연합뉴스
전기차 세계 1위 테슬라는 지난해 ‘반값 전기차’를 공식화했다. 시장은 일단 규모의 경제를 통해 가격 경쟁력에서 앞서 가겠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향후 테슬라의 계획엔 자율주행 기반의 모빌리티 서비스가 포함돼 있다. 품질 문제는 끊임없이 지적받고 있지만 시장 선점 속도가 매섭다. 애플의 자동차 IT 기술과 자율주행 솔루션은 최근 자체적으로 목표한 단계까지 접어든 것으로 관측된다. 이미 한 발 늦은 상황인 만큼 시간이 흐를수록 애플에 불리하다.
애플 입장에선 규모의 경제를 통한 가격 경쟁력과 고품질의 완성도를 보장할 수 있는 생산 능력이 필요하다. 특히 전기차는 전용 플랫폼이 핵심 경쟁력으로 통한다. 내연기관 플랫폼에 배터리를 얹는 것보다 공간 효율성과 안전성이 높다. 세계 자동차 업체 가운데 전용 플랫폼을 갖춘 곳은 테슬라·GM(BEV)·폴크스바겐(MEB) 3곳이고, 2021년 올해 현대차(E-GMP)와 도요타(e-TNGA)가 구축한다.
테슬라와 애플의 경쟁구도가 만들어진 만큼 협업 가능성은 적다. 폴크스바겐·GM은 자사 제품 생산을 위한 별도의 파트너십을 만들 계획이 없다. 도요타는 전기차 경쟁력에선 현대차에 밀린다. 현대차가 내세우고 있는 전기차 플랫폼 E-GMP의 강점은 자유롭고 유연한 설계가 가능해 여러 차종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애플 입장에선 자신들의 입맛에 맞춰 상품을 내놓을 수 있다. 애플은 아이폰 국내 진출 당시 SK텔레콤이 아닌 KT를 선택한 것처럼 그동안 파트너십을 맺을 땐 시장 1위 사업자보다는 업계 2위 또는 그 이하 업체들과 협업하는 전략을 써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앞서 애플이 여러 업체에 협업 제안을 한 것으로 알려졌음에도 국내는 물론 세계 자동차 업계에선 현대차와의 협업 가능성을 높게 점치고 있다.
증권가에선 현대차 입장에서 애플을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분석한다. 어차피 누군가는 애플과 손을 잡게 될 것이고, 보수적으로만 생각했다가 경쟁사에 기회를 빼앗긴다는 것이다. 전기차 플랫폼을 ‘대여’ 또는 ‘판매’하는 방안도 검토해볼 만하다는 주장도 있다. 현대차의 새로운 비즈니스 영역이 생기게 되는 셈이라 기존 생산 물량과 더해져 규모의 경제에 따른 가격 경쟁력이 생긴다. 애플과 협업 소식이 알려진 이후 현대모비스 등 납품업체 주가가 오른 것도 전기차 플랫폼 대량 생산 가능성에 대한 기대감이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현대차가 지난해 말부터 내연기관 개발을 중단해 미래 모빌리티 전환에 힘을 주고 있고, 이미 반자율주행 기술을 어느 정도 확보했지만, 향후 소프트웨어 중심의 전기차 시장에서 홀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미 이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업체와 협업해 시장을 선점하는 것도 한 가지 방안“이라고 말했다.
다만 자동차 업계에선 마냥 반길 일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미 애플 외에도 구글과 아마존 등 빅테크 기업들이 자동차 시장에 뛰어들어 자율주행, 모빌리티 서비스 솔루션에 전사적 역량을 쏟아 붓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자동차 업계가 조립 업체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다. 애플은 아이폰을 만들 때 플랫폼을 보유한 업체와 협력해 생산하는 제조자 설계생산(ODM)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여기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미래 모빌리티 사업을 추진하면서 자동차 제조를 50%까지 줄이고, 나머지는 개인용 비행체(PAV) 30%, 로보틱스 20%로 채우겠다고 공언했다. 미래 전략에 차질이 생기고, 장기적으로는 잠재적 경쟁자에게 주도권을 내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대해 한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협업을 한다면 아이폰 생산 방식보다는 삼성 갤럭시에 안드로이드OS가 들어가는 형태로, 일정 기간 동안 독점적 지위로 협업을 약속 받는다면 현대차 입장에서도 검토해볼 만한 조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현대차 관계자는 ”다수의 기업으로부터 자율주행 전기차 관련 공동개발 협력요청을 받고 있으나, 초기 단계로 결정된 바 없다“면서 ”확정되는 시점 또는 1개월 이내 재공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