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호소하는 친구가 있을 때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까. 나라면, 그냥 들어줄 수밖에.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는 그 자체로 세상의 자리, ‘나’의 자리다. 친구 콜이 절망할 때 앤이 그랬듯.
다시, ‘빨강머리 앤’이 찾아왔다. 시즌1·2·3으로. 호기심 많은 열정적인 소녀가 돌아와 다시 한 번 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자연 속에서 배우고, 실수 혹은 실패를 해도 좋으니 원하는 것을 무시하지 말라고, 우정 혹은 인연을 소중히 하며 살라고 말이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나이가 들어 책이나 애니메이션이 아닌 드라마 속 앤을 보니 다시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앤을 둘러싼 성숙한, 혹은 성숙하지 못한 어른들이었다. 앤을 입양함으로써 앤으로 인해 그녀의 생에선 생경한 모성을 경험하고 있는 마릴라가, 못생겼다며 절망하는 사춘기소녀 앤에게 해주는 말은 어른스러웠다.
“외모에 연연하지 마라. 평범한 게 더 나아. 그건 선물이야. 진짜란다.”
남들 보기에 예쁘면 다들 그 사람에게 그것만 기대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 기대에 부응하느라 종종 자기를 잃게 되는데, 생긴 것으로 주위를 끌지 않으면 자기 모습 그대로 삶을 살아가기 수월하다는 것이다. 경험에서 나온 그런 소중한 말이 사춘기를 시작하는 소녀에게 어떤 힘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어른이 옆에 있다는 것은 든든한 버팀목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마 앤이 생의 주도권을 잃지 않고 자기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가족으로 받아들이며 깊은 정을 나눠주는 마릴라와 매슈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인간은 정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 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인생은 아무리 머리가 좋고 재능이 있어도 자기 모습대로 살아갈 수가 없다. 그 정은 나누면서 배우는 법이기도 하다. 앤의 아버지 노릇을 하고 있는 매슈에겐 첫사랑 여인 지니가 있다. 더디고 주춤하는 매슈의 사랑이 답답하기만 한 앤은 매슈 몰래 매슈 이름으로 지니에게 러브레터를 씀으로써 사랑의 전령사 노릇을 한다. 그 사실이 드러났을 때 어른들은 어떻게 했을까. 아무리 진심이었어도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는 마음의 영역이 있음을 단호하게 알려주면서 사과하도록 한다.
“사람마다 감정을 처리하는 속도가 다르니까 함부로 개입해서는 안 되는 거야.”
알려졌듯이 앤은 커스버트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기 전 어린 시절 학대 속에서 성장했다. 안에 감춰져 있는 것은 바깥으로 터져 나오기 마련이어서 종종 앤은 상식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마을 사람들을 당황하게 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앤을 보듬고 지키는 어른들이 있었기 때문에 앤은 자기를 사랑하는 모습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렇듯 어른이 아이의 울타리여야 하는데, 울타리가 아닌 감옥이 되고 있는 어른들이 있다. 그들이 학대하는 부모가 되는 것은 학대받는 상황에서 성장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통제와 편견 속에서 자기 모습대로 살지 못해 불행할 줄도 모른 채 불행한 사람들이 그들에 기대 살아가야 하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것은 뻔하다, 통제의 틀과 분노다.
법은 최후의 보루다. 법으로 학대를 금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대체 왜 ‘나’는 함께 사는 사람에게 화를 내고, 그를 이용하려 들고, 통제하려드는지 알아채야 한다. 그 알아차리는 일이 내 속에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울고 있는 내면아이를 돌보는 일이다. 그 일이야말로 내 통제의 틀을 부수고 두려움에서 해방되는, ‘나’를 돌보는 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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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