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에 가나… 현에 가나… ‘한숨’만
▲ 왼쪽부터 정몽구 회장과 현정은 회장. |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그룹은 지난 9월 27일 현대건설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인수전 참여를 공식 선언했다. 그동안 공공연하게 현대건설 인수 의사를 밝혀온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도 제출 마감일인 10월 1일 인수의향서를 제출하고 인수전에 불을 댕긴 상태. 2파전으로 전개될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일단 현대차그룹이 우세할 것이라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두 그룹 간 자금력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다.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자료에 따르면 현대차그룹의 자산규모는 100조 7000억 원으로, 현대그룹 12조 4000억 원의 8배가 된다. 이를 근거로 한 재계 순위에서 현대차그룹 2위, 현대그룹은 21위(공기업 제외)를 차지하고 있다. 자산규모 9조 8000억 원의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현대그룹은 재계 순위 14위까지 단숨에 올라설 수 있지만 문제는 규모가 엇비슷한 현대건설을 인수할 자금 충당 방법이다.
현대건설 인수 가격은 3조 5000억 원에서 4조 원 사이로 점쳐지지만 두 그룹 간 대결이 과열될 경우 4조 원을 넘어설 가능성도 엿보인다. 현재 1조 5000억 원 정도의 내부자금을 확보한 현대그룹은 독일 M+W그룹을 전략적 투자자로 끌어들였고, 재무 투자자들을 추가로 유치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반면 현금성 자산 4조 원을 확보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은 수치상 자체 자금으로도 인수가 가능한 상태. 여기에 일부 우량 계열사의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 관측까지 더해지고 있다.
정몽구-현정은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을 통해 현대건설 가격이 오르면 오를수록 현대건설 매각주체인 채권단엔 득이 되는 일이겠지만 이와 관련한 채권단의 고민이 작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와 금융권에선 “만약 현대그룹이 현대차그룹보다 더 높은 입찰가를 써낼 경우 채권단이 큰 고민에 빠지게 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현대그룹의 입찰가가 더 높을 경우 채권단이 그동안 갈등관계에 놓였던 현대그룹에 우선협상 자격을 선뜻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현대건설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은 현대그룹의 주거래은행이기도 하다. 현대그룹은 지난 4월 채권단으로부터 재무구조 개선 약정(재무약정) 대상 통보를 받은 데 이어 신규 여신 중단과 만기 도래 여신 회수 조치 등 제재를 당하기도 했다. 이를 주도한 건 외환은행이었다. 지난 9월 17일 채권단 제재 조치를 풀어달라는 현대그룹의 가처분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이는 판결을 내린 상태지만 앙금은 여전하다.
게다가 현대건설 인수에 사활을 건 현대그룹이 자금력에서 밀리지만 현대차그룹보다 더 높은 입찰가를 적어낼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현대건설 채권단 내부에 대우건설이나 대우조선해양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라 입을 모은다. 지난 2006년 11월 금호아시아나그룹은 대우건설을 인수했지만 이후 유동성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2년 7개월 만인 지난해 6월 대우건설 재매각 방침을 발표했다. 대우건설 인수 후유증은 결국 금호아시아나그룹 워크아웃 돌입의 단초가 되기도 했다.
한화그룹 역시 지난 2008년 12월 대우조선해양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으나 이후 닥친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인수 포기를 선언하게 됐다. 현대건설 채권단 주변에선 “만약 현대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가 외부로부터 자금을 충분히 조달받지 못한다면…”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 현대그룹 TV광고 화면 캡처 사진. |
이 경우 현대상선 자회사인 현대증권 등 현대그룹 계열사 경영권도 부수적으로 취할 수 있게 된다. 금융권에선 현대건설 채권단과 현대차그룹 간의 밀월설까지 퍼졌던 터라 현대차가 현대건설을 인수할 경우 이에 따른 현대상선 지분 획득이 현대건설 채권단을 향해 어떤 여론을 낳게 될지도 관심을 끈다.
이런 까닭에 재계와 금융권 일각에선 ‘정몽구 회장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대신 현정은 회장에게 현대건설 보유 현대상선 지분을 양도하는 방안’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현대그룹의 TV 광고 내용과 관련해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이 갈등을 빚으며 정몽구-현정은 두 사람 간의 물밑 타협 가능성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관측된다.
현대그룹은 지난 9월 21일부터 ‘현대건설, 현대그룹이 지키겠습니다’란 내용의 TV 광고를 통해 현대건설 회생을 위해 현 회장 남편인 고 정몽헌 회장이 지난 2001년 4400억 원의 사재를 출연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은 당시의 사재출연이 고 정몽헌 회장 지분이 아닌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지분이었다는 주장을 하며 ‘허위 광고’ 논란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2000년 4월 6일자로 작성된 ‘본인 정주영은 정몽헌에게 본인이 소유한 별지 목록의 재산(주식 동산 부동산 등)을 처분하고 관리하는 일체의 권한을 위임한다’는 내용의 위임장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현대그룹이 현대차그룹을 향해 ‘자동차에나 신경 써라’는 식의 신문 광고를 내보내면서 현대그룹을 향한 현대차 측의 감정이 꽤나 격앙된 상태라고 한다. 재계와 금융권에선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전을 둘러싼 갈등의 골을 좁힐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