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통일 평생 투쟁, 불쌈꾼이자 통일꾼…동아리 새내기 등 순우리말 발굴 최고 입담꾼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빈소가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돼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독립운동가 할아버지와 김구 선생
고 백기완 소장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조부 백태주는 독립운동가로 원래 천석꾼 부자였지만 독립운동을 위해 재산을 모두 쓰고 결국 고문을 당해 옥사했다. 3·1 운동 때 수천 장의 태극기를 제작해 배포했고 민족대학 건립 운동을 펼쳤으며 독립군에 군자금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고인은 독립운동가인 할아버지를 통해 백범 김구 선생과 인연을 맺는다. 1898년 김구 선생은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리서에 수감됐다가 탈옥해 백태주 선생의 집으로 피신한다. 해방된 뒤 백 소장은 부친과 함께 서울에 갔다가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됐는데 어린 백 소장이 마음에 들었던 김구 선생은 한시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를 휘호로 써주고 중학교까지 학비를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김구 선생이 공부시켜 준다는 얘기를 듣고 좋아한 어린 백 소장에 그의 부친은 ‘혁명가가 되든 깡패가 되든 네 힘으로 해야지 도움 받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국 고인의 최종 학력은 국민학교 4학년 중퇴다.
당시의 인연은 1972년 백 소장이 백범사상연구소를 개소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는 항일운동 연구에 전념하며 신채호, 김구 등의 글을 수집·정리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노랫말로 유명한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는 사실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의 중간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바로 이 시를 모태로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진 것인데 1979년 보안사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뒤 차디찬 독방에서 탄생한 시로 알려져 있다.
백기완 소장은 1950년대 후반부터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 활동을 비롯해 농민과 빈민운동에 투신했다. 함석헌, 계훈제, 변영태 등과 함께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한 것을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백 소장은 1973년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해 1974년 1월 장준하 선생 등과 함께 구속됐다.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5년, 2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그는 1975년 형 집행 정지로 석방됐지만 10·26 직후인 1979년 11월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인 ‘YWCA 위장결혼’ 사건으로 다시 구속 수감됐다.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 받았지만 1980년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KBS 1라디오 ‘주진우 라이브’에 출연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하셨다”며 “조선의 범이라고 불리셨던 분인데 그때 몸을 완전히 상하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사건은 결국 재심을 거쳐 39년 만인 2019년 11월 무죄를 선고 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대통령 후보 기호 8번 백기완
재야운동가로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백 소장의 존재감이 일반 대중에게 각인된 것은 1987년이다. 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백 소장은 후보등록 마감시간 직전에 등록해 기호 8번 후보가 됐다. 기호 1번 노태우, 2번 김영삼, 3번 김대중, 4번 김종필 등이 출마한 13대 대통령 선거에 고인이 출마한 까닭은 당시 집권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를 이겨 군정을 종식시키려면 반드시 김영삼 김대중 야권후보 단일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결국 김영삼 김대중 야권후보 단일화를 호소하며 중도 사퇴했으나 단일화는 이뤄지지 않았다.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다시 맞붙은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인은 재야운동권 독자 후보로 추대돼 출마했지만 5위로 낙선했다.
2019년 3월 서울 종로구 통일문제연구소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할 당시의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몇 달 뒤인 2020년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이어오다 지난 2월 15일 오전 영면했다. 사진=일요신문DB
이보다 앞선 1984년 백범사상연구소를 해체하고 통일문제연구소를 설립한 고인은 소장으로 활동하며 남북통일과 민족화합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비정규직·해고노동자들의 전국 투쟁현장에 꾸준히 참석한 백 소장은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용산참사 투쟁, 밀양 송전탑 반대운동, 이명박 정권 퇴진운동, 세월호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운동, 그리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요구 촛불집회 등에 빠지지 않고 참석해 늘 가장 앞자리를 지켰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백기완 소장은 시위 현장 등에서 만난 이들이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 오면 늘 “앞으로는 잘잘이라고 인사하라”는 말을 하곤 했다. 가장 흔한 인사말인 “안녕하세요”의 ‘안녕’이 한자이고 “바이바이”는 영어다. 대신 순우리말 인사말로 “잘잘”을 사용하자는 의미다.
고인은 자신의 소설이나 수필 등에서도 ‘잘잘’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그 뜻을 때로는 ‘잘 있어요, 잘 가세요’로 풀이하기도 하고 ‘잘 가거라, 나도 잘 있을게’로 풀이하기도 했다. 한문이나 영어가 아닌 순우리말 인사말을 만들고자 했던 고인의 생각이 ‘잘잘’이라는 표현로 이어진 것이다.
순우리말을 되살려야 한다는 고인의 생각에 의해 죽어 있던 말들이 다시 살아나 이제는 많이 쓰는 말이 된 것들이 많다. 서클이라는 외래어 대신 동아리, 신입생 대신 새내기, MT 대신 모꼬지, 판자촌 대신 달동네 등의 표현이 대표적이다. 한홍구 교수는 “백기완 선생이 남긴 회고록은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못지않은 우리말의 보고”라고 설명한다.
이렇게 좋은 순우리말 단어를 많이 되살린 고인은 말도 매우 잘해 황석영, 방배추(본명 방동규)와 함께 ‘조선 3대 입담꾼’으로 불렸다. 오랜 지인들은 지금도 1970년대 유신정권 시절 피맛골 막걸리 집에서 풀어놓던 백기완의 입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얘기할 정도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