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근 동기들 “김명수 탄핵 먼저” 반발…실제 탄핵 가능성 낮아, 자진 사퇴도 셈법 복잡
2월 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퇴를 촉구하는 근조화환 수십여 개가 놓여 있었다. 또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가운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출근을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사법부가 ‘국회의 임성근 부장판사 탄핵’ 과정에서 김명수 딜레마에 빠졌다. 더불어민주당 등 범여권은 180명에 가까운 몰표로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탄핵을 가결시켰지만, 이 과정에서 김명수 대법원장의 ‘발언’이 공개돼 파장이 일고 있다. 임성근 부장판사가 녹음했다가 공개한 김 대법원장과의 대화 녹취 파일에서 김 대법원장이 “지금 사의를 받아주면 국회에서 탄핵을 할 수 없다”는 취지로 발언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판사들이 삼삼오오 ‘김명수 책임론’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의 가능성도 제기된다. 김 대법원장이 자의로 그만두지 않는다면, 야당 등이 밀어붙이고 있는 탄핵이 유일한 카드인데 국회 내 여대야소 구조를 보면 가능성은 낮다. 스스로 그만두는 것 역시 정치적으로 셈법이 복잡해진다. 문재인 정부가 정권 5년 차에, 임기 6년의 대법원장을 또 새롭게 임명할 경우 다음 정부는 ‘앞 정부’가 임명한 대법원장과 임기 내내 동행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홍’ 휩싸인 법원
법관 탄핵소추안 찬성 179, 반대 102.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헌정 사상 초유의 법관 탄핵소추안 표결에서 범여권 의원들은 사실상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 2월 4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원 288명이 참여해 진행된 무기명 투표에서 민주당은 코로나19 자가격리 중인 송갑석 윤영덕 조오섭 의원과 박범계 법무부 장관, 한정애 환경부 장관 등을 제외한 169명이 표결에 참석해 임성근 부장판사 탄핵을 가결시켰다.
국민의힘과 야당 출신 무소속 의원들이 102표의 반대표를 던졌지만,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정의당(6석)과 열린민주당(3석), 기본소득당(1석) 등이 ‘탄핵 찬성’ 의사를 밝힌 것을 고려할 때 진보진영이 똘똘 뭉쳐 ‘판사 탄핵’이라는 결과물을 이뤄낸 셈이다.
임성근 부장판사의 탄핵 사유는 재판 개입 혐의.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 시절 전직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세월호 7시간’ 칼럼 재판부에 판결문 수정을 지시한 혐의다. 검찰 수사 끝에 기소됐지만 현재 1심에서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법원에서는 무죄를 받았지만, 내부 징계에서는 견책을 받았다.
국회는 사상 초유의 판사 탄핵을 일사천리로 진행했지만, 정작 내홍은 법원에서 확산되고 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해 5월 탄핵을 거론하며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표를 반려한 데 이어 12월에도 사표를 거부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김 대법원장은 “그런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임 부장판사의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김 대법원장이 ‘거짓말쟁이’가 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녹취록 등을 종합하면 임 부장판사는 지난해 5월과 12월 김 대법원장을 만나 건강상 문제로 사의를 표했으나 김 대법원장은 “탄핵이라는 얘기를 꺼내지도 못하게 오늘 그냥 (사표를) 수리해버리면 (국회가) 탄핵 얘기를 못 하잖아. 그런 비난을 받는 것은 굉장히 적절하지 않다”거나 “이제 사표 수리 제출 그러한 법률적인 것은 차치하고 나로서는 여러 영향이랄까 뭐 그걸 생각해야 한다”며 정치권의 움직임을 염두에 둔 발언을 쏟아냈다.
“(국회 탄핵 추진 관련) 말을 한 적이 없다”던 김명수 대법원장은 결국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며 녹취파일 공개 후 고개를 숙여야 했다. 하지만 법조계는 발칵 뒤집혔다. 삼권분립의 한 축으로 입법부(국회)와 행정부(정부)로부터 독립된 권력인 사법부(법원)의 장이 정치권의 눈치를 보거나 동조하는 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법원 내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법연수원 17기 동기들이 가장 먼저 나섰다. 17기 동기 140여 명은 5일 성명서를 통해 “김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8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출근하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 사진=임준선 기자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의 사법연수원 17기 동기들이 가장 먼저 나섰다. 17기 동기 140여 명은 5일 성명서를 통해 “김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그는 법원의 수장으로서 자신이 지켜야 할 판사를 보호하기는커녕 탄핵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도록 내팽개쳤다”고 비판했다.
법원 내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윤종구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망에 “법관의 직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헌법에서 보장된 직업 선택의 자유다.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헌법적 정당성이 있어야 한다”며 김 대법원장을 겨냥한 글을 올렸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김 대법원장의 발언에 대해 ‘사법부의 장이 할 말은 아니었다, 소속 판사가 아니라 정치권의 편에 섰다’는 비판에는 대부분 동의하는 상황이다.
익명의 한 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사법부를 대표하는 ‘장’이 아니라,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장’이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 것 아니겠냐”며 “평소에도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논란이 있었는데 이번 이슈를 계기로 완전히 실망했다”고 비판했다.
임성근 부장판사의 사의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는 점도 김명수 대법원장에 대한 비난을 가중시키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탄핵 사유가 있는 공무원의 사표 수리 여부에 관한 명시적 규정이 국가공무원법이나 법관징계법 등에 없다”며 “정치적인 이유만으로 사의를 거절했다면 김 대법원장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임 부장판사와 함께 ‘탄핵 법관 명단’에 올랐던 이동근 전 부장판사는 사표가 수리돼 9일자로 퇴임했다.
#야당, 김명수 거취 압박
당장 야당은 김명수 대법원장의 거취를 압박하고 있다. 김 대법원장을 향해 자진 사퇴와 탄핵 압박을 동시에 가하고 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 끌어내리기까지의 셈법은 복잡하다. 일단 탄핵은 실현 가능성이 낮다. 임성근 부장판사 때도 범여권이 179표라는 압도적인 몰표로 ‘탄핵 가결’을 시켰는데, 범여권은 이번 김명수 대법원장 논란에서도 “오히려 녹취가 문제”라며 발언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국회 내 표 대결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는 얘기다.
김 대법원장이 스스로 물러날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김 대법원장은 한 차례 사과 후에는 별다른 입장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도 임기 5년 차에, 임기 6년의 새로운 대법원장을 임명하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2017년 5월에 임명된 김 대법원장의 임기는 2023년에 끝이 난다. 하지만 지금 사퇴할 경우 문재인 정부는 임기가 2021년 시작해 2027년 끝나는 대법원장을 임명하게 되고, 내년 출범할 새로운 정부는 임명된 대법원장과 임기 내내 동행을 해야 한다. 이는 야당인 국민의힘 입장에서도 달갑지 않을 것이라는 추론도 나오는 대목이다.
앞선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김 대법원장의 거취를 놓고 법조계와 정치계의 시선은 또 다를 것 같다”며 “앞선 임성근 부장판사 탄핵 때부터, 김 대법원장 발언과 거취까지, 사법부가 입법 권력의 영향에 너무 취약해진 것 같아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