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자들 반란…‘정상까지 내달려라’
▲ 왼쪽부터 삼성화재배 4강에 오른 김지석 7단, 구리 9단, 허영호 7단, 박정환 8단. |
10월 14일 유성 삼성연수원에서 열린 제15회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8강전은 한국 5명 대 중국 3명의 대결이었다. 한국은 에이스 이세돌 9단을 비롯해 원성진 9단, 박정환 8단, 허영호 7단, 김지석 7단이, 중국은 구리 9단, 콩지에 9단의 쌍두마차에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왕레이 6단이 출전했다. 전 날 13일에 벌어진 16강전에서 이창호 9단은 콩지에에게, 최철한 9단은 동생 박정환에게, 박영훈 9단은 왕레이에게 져 탈락했다.
이세돌-구리, 허영호-왕레이, 원성진-박정환, 김지석-콩지에의 8강전에서 제일 먼저 이세돌이 불계패를 당하며 내려갔다. 구리는 한국 한상훈 5단과의 16강에서도 그랬지만, 중반의 고비에서 승부를 휘감는 엄청난 힘을 보여 주었다. 최근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면서 전인미답, 환상의 승률 90%에 불과 1% 차이로 접근하고 있는 이세돌인데, 충격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이창호 9단이 요즘 결혼을 앞두고 심신이 좀 들뜬 탓인지 평소 그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실수로 허망하게 연패하고 있어 이세돌의 어깨가 조금은 더 무거웠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승전보가 속속 날아들었다. 꽃미남 김지석이 콩지에를 상대로 배짱 두둑한 승부수로 역전극을 일구어냈다. 중반 초입부터 대마가 얽히고설킨 난타전이었는데 한때 우리 검토실에서도 “김지석의 대마가 위험하다. 절망적이다”라는 소리가 나왔으나 결정적인 순간에서 콩지에가 몸을 사렸고, 다음 순간 김지석의 카운터 펀치가 작렬했던 것. 검토실은 “김지석이 그냥 꽃미남이 아니라 이제는 천하장사 꽃미남이 되었다”면서 환호했다.
원성진-박정환의 바둑은 대국자들은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었으나 우리 응원석에선 누가 이겨도 좋다는 분위기. 실제 승부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얼마 전까지라면 5.5 대 4.5 정도로는 박정환 쪽에 베팅이 더 갔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몰랐다. 원성진은 7월 18일 이후 최근 20전17승3패, 승률 85%. 게다가 9월 5일 이후엔 9연승을 달리고 있는 중이니까. 그러나 결과는 박정환의 승리.
허영호-왕레이 판에선 허영호가 시종 여유 있게 밀어붙였다. 허영호의 기세가 놀랍다. 1986년생, 2001년 입단. 입단 이후 지금까지 줄곧 성적은 상위권이었으나 주목할 만한 한 방은 없어서 그저 여러 명 A급 기사 가운데 하나로 지나가나 보다 싶었는데, 올 시즌 돌연 화산 분출을 보여 주고 있다.
하반기 시작인 7월 2일부터 22전 16승 6패.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상승세가 가팔라지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연승 가도를 질주하면서, 앞에서도 말했지만 ‘두면 이긴다’ ‘지는 법을 잊었다’ 등 온갖 찬사를 듣고 있다. 성적 자체로는 원성진에게 좀 뒤지지만, 원성진이 데뷔 시절부터 주목받던 인물이고 그 정도의 성적은 예측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 비해 허영호는 느닷없이 몰아닥친 폭풍 같은 것이어서 ‘체감충격’이 훨씬 강렬한 것.
허영호는 어쩌면 새로운 모델이 될지 모르겠다. 정상권 기사들은 대개는 입단 직후부터 성적을 내고 조명을 받는 법인데, 이건 입단 후 죽 잠잠하다가 9년차에 접어들어 갑자기 무패행진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11월에 열릴 예정인 삼성화재배 4강전은 허영호-박정환, 김지석-구리의 대결.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아직은 구리가 한 발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고 우리 셋은 예측 불허라고 해야 할 텐데, 셋 모두에게 기회라는 것이 흥미롭다.
김지석과 박정환은 국내용에서 환골탈태해 세계 랭커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 허영호로선 뒤늦게 걸린 시동으로 곧장 탄력을 받아 단숨에 세계 정상까지 치고 올라가는 일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 밴쿠버 동계올림픽 때 이상화가 그랬던가, 인생역전이라고. 상대는 구리. 그런데 허영호는 앞서 32강전에서 구리를 꺾은 바 있다. 더블 일리미네이션이라는 진행방식 덕분에 구리는 허영호에게 지고도 살아남았지만, 어쨌거나 이겨 본 경험은 귀한 무기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