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뽐뿌질당해 지름신 내렸죠” “말이야 막걸리야”
▲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한시장조사업체가 직장인 5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0명 중 3명이 사내에서 은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사내에서 은어를 가장 많이 쓸 때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60%가량이 ‘동료들끼리 뒷담화를 할 때’라고 응답했다. 대놓고 이름을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특정인을 지칭하는 특별한 단어가 개발된다. 당사자는 모르는 별명인 셈이다. 유통회사에 근무하는 C 씨(여·29)도 은어를 자주 사용한다. 양심상 찔리는 일이지만 같은 부서 선배를 험담할 때 주로 은어를 쓴다고 털어놓았다.
“같은 팀에 여자 선배가 있는데 좀 특이해요. 저를 비롯해 다른 동료들은 늘 변함없이 대하고 똑같은데도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토라졌다가 불현듯 와서는 ‘언니답지 못해 미안하다’고 갑자기 사과를 해요. 그걸 듣는 저희 팀원들은 어리둥절하죠. 토라졌을 때는 바로 밥부터 같이 안 먹기 때문에 그걸 신호로 알 수 있어요. 그럼 다른 동료들과 모여서 ‘이유가 뭐래니?’ 하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들쑥날쑥 알 수 없는 행동으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게 사이코 같다고 해서 보통 그 선배를 ‘이코’라고 불러요.”
C 씨는 은어를 사용하다 아찔한 순간을 겪기도 했다. 한번은 그 선배가 어디서 들었는지 ‘이코’가 뭔지 물어봤던 것. 그는 “그냥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사람 중 하나라고 둘러댔는데 순간 진땀이 났다”며 “이후론 조심해서 사용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런 은어라면 직장 상사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회사마다 부장 과장 사장 등을 지칭하는 특정 단어가 있게 마련이다. 여행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O 씨(여·33)는 나름 신경 써서 예쁜 은어를 사용한다고.
“솔직히 직장생활 하면서 상사나 사장 때문에 짜증났던 경험은 누구나 있죠. 그럴 땐 지인이나 동료들과 뒷담화하면서 풀어야지 안 그러면 속에 그대로 쌓이잖아요. 그래도 저는 악의적인 의미가 담긴 은어를 사용하진 않아요. 입에 담기도 좋고 혹 들키더라도 후폭풍이 거의 없는 단어를 씁니다. 예를 들어 사장은 ‘사랑이’, 상무는 ‘믿음이’, 부장은 ‘소망이’라고 해요. 이러면 동료들끼리 모여서 사랑 믿음 소망 어쩌고 하면 좀 덜 찔린다고나 할까요?”
은어는 업무를 할 때도 다양하게 사용된다. 특정 부서나, 업종에서만 사용하는 은어를 쓸 때면 일종의 소속감까지 느낀다. 독특한 은어를 사용하면서 동료나 상사들과 친분관계가 돈독해지는 경험도 하게 된다.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B 씨(30)는 사무실에서 쓰이는 은어가 다른 회사에 비해 유난히 ‘개그스럽다’고 말한다. 여직원보다는 남직원이 태반인 사무실이라 그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단다.
“과장님이 좀 유머 있는 분이라 평소에도 평범한 단어를 장난스럽고 기발한 단어로 대체해서 많이 쓰는 편이세요. 한번은 출장을 가시면서 저한테 ‘숙변 좀 처리해 놔라’ 하시는 거예요. 놀라서 ‘과장님 것을 제가 어떻게…’라고 했는데 알고 보니 숙변은 밀린 일을 의미하는 거더라고요. 그 뒤론 숙변이 일상적인 은어가 됐어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일찍 퇴근하던 날 좀 조용히 살금살금 사무실을 나섰는데 다음날 과장님이 ‘어제 낮은 포복하더니 어디 갔었냐?’고 하시더군요. 이제는 좀 일찍 일어서야 하는 날에는 ‘낮은 포복 좀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다 알아듣습니다.”
제약회사 영업파트에서 일하는 J 씨(32)도 사무실에서 은어를 자주 사용한다. 꼭 사무실에서만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고 업계에서 통하는 은어라 어찌 보면 신입들에게는 ‘필수 전문용어’라고 충고한다.
“종합병원 의사를 만나려면 수술 집도 전 이른 아침에 일찍 병원에 방문해야 하죠. 이런 걸 조간에 방문한다고 해서 예전에는 ‘조방’이라고 했었는데 요즘에는 보통 MVP(Morning Visiting Program)라고 하죠. 저녁 방문은 비슷하게 EVP(Evening Visiting Program)라고 하는데 늦은 시간에 방문하니까 현지 퇴근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상사가 ‘내일 MVP 누가 나가나’라고 묻는 거죠. 대학병원의 핵심교수는 ‘키맨’(Key man)으로 불리기도 해요. 이런 분들한테는 MCP(Monthly Call Program)라고, 담당자들이 의무적으로 안부 인사를 돌려요.”
은어는 사내 커플에게도 유용하게 쓰인다. 이들에게 은어는 일종의 암호다. 보험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L 씨(30)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자친구와 둘만 사용하는 은어가 있단다.
“저희는 회사 내에서 잠깐씩 보면서 스릴을 즐기는 편이죠. 일단 휴대전화에는 생판 모르는 사람으로 저장해 놓습니다. 그리고 자주 가는 장소별로 번호를 정해놨어요. 1번은 옥상, 2번은 계단, 3번은 지하 주차장이에요. 문자로 1번 하면 옥상에서 보자는 뜻이죠. 요새는 4번으로 많이 갑니다. 4번은 바로 2개 층 아래인 다른 회사 계단이라 안전하거든요. 1-3번은 옥상에서 커피 한 잔하고 퇴근하자는 의미입니다. 차가 지하에 있으니까요. 이제는 익숙해져서 굉장히 편리한데 처음에는 서로 헷갈려서 엉뚱한 장소에 나가 있고 그랬습니다.”
작은 무역회사를 경영하는 K 사장(43)은 인터넷 은어를 몰라서 여직원과 대화할 때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고 털어놨다.
“직원들과 살갑게 지내려고 노력하는데 요즘 젊은 친구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사용할 때가 많더라고요. 얼마 전에 직원이 소개팅을 했다기에 그 사람 어떠냐고 했더니 ‘좀 갈비인 것 같아요’ 그러데요. 그래서 남자가 그렇게 마르면 못쓰지 했더니 막 웃더군요. 갈비는 ‘갈수록 비호감’의 준말이지 뭡니까. 좋은 카메라를 샀다고 해서 어디서 어떻게 샀느냐고 했더니 ‘동호회 갔다가 사진 보고 뽐뿌질당해서 지름신이 내렸다’고 그래요. 알고 보니 ‘뽐뿌질’은 더 좋은 걸 사고 싶은 마음이고 ‘지름신’은 구매 욕구를 지칭하는 은어였어요. 저 같은 사람한테는 참 어렵습니다.”
인사 관련 전문가들은 은어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비치기보다는 되도록 빨리 숙지하라는 의견을 많이 내놓는다. 조직의 결속력이 강할수록 은어 사용이 빈번하고 많다는 것. 이러한 은어에 정통할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진단다. 은어까지 따로 공부해야 하는 시대다.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