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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왼쪽)정주영 회장,조중훈 회장 | ||
한국 재계도 반세기를 넘으면서 역사에 기록될 만한 많은 사실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 재계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을 꼽으라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을 거론하는 사람이 많다. 두 사람은 모두 작고했다. 재계 인사들이 이들 두 사람을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꼽는 이유는 맨손으로 거대 기업을 일궈낸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의 재벌들을 뜯어보면 원래 조상 대대로 부자였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삼성그룹을 일궈낸 이병철 회장이나, LG그룹을 창업한 구인회 회장, 효성그룹을 창업한 조홍제 회장 등은 태생적으로 거부집 후손이었다.
이에 반해 정 회장이나 조 회장은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한 인물이었다. 맨손으로 시대의 흐름을 잘 읽어 엄청난 부를 거머쥔 성공시대의 표본이었던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이지만 생전에 그리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너무나 많은 공통점을 가진 탓이었을까. 나이는 정 회장이 1915년생이고, 조 회장은 1920년생이어서 정 회장이 다섯 살 위였다. 두 사람이 사업을 시작한 시기는 정 회장이 40년대 무렵이고 조 회장은 50년대여서 약 10년의 차이가 있다.
정 회장은 현대건설과 현대자동차로 떼돈을 벌었고, 조 회장은 독점사업이던 대한항공을 기반으로 돈방석에 앉았다. 공통점은 현대건설은 중동붐을 타고 급성장했고, 대한항공은 월남전으로 재벌의 기반을 쌓는 등 두 사람 모두 해외사업으로 성공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를 들면 두 사람 모두 박정희 대통령의 각별한 총애가 성공의 커다란 원동력이었다는 점도 있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가 서먹해진 것은 서슬퍼런 5공 정부가 등장했던 80년 초반 무렵이었다. 당시 5공 세력들은 재계의 지원을 받기 위해 전경련을 앞세워 재벌들을 일렬종대로 세웠다.
이즈음 전경련 회장은 정주영 회장이 맡고 있었다. 정 회장은 개인적으론 5공세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지만, 살아있는 권력에 저항할 수는 없었다.
5공정권은 출범 이후 세칭 권력유지비용 조달을 위해 이런저런 명목으로 재벌들에게 손을 벌렸다. 물론 이 같은 요구는 전경련을 창구로 이뤄졌다. 이 때문에 전경련은 소속사(대부분 재벌그룹)들을 매출순위에 따라 일정액을 차등분할해 자금을 거두어 전달하게 됐다.
이로 인해 당연히 전경련에는 기업간 서열이 매겨지게 됐다. 10대재벌이니, 20대재벌이니, 30대재벌이니 하는 식의 서열이 매겨진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결국 이 같은 서열은 누가 얼마나 돈을 내느냐 하는 의미가 더 컸던 셈이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고나서 얼마되지 않아 청와대로부터 뜻밖의 성금기탁요청(말이 요청이지 강제적이었다는 게 당시 재계 인사들의 전언이다)이 날아들었다. 바로 평화의 댐 성금모금이었다. 평화의 댐은 북한이 북한강 수계 상류에 거대한 댐을 세운 데 따른 수공에 대비하기 위한 대응댐이었다. 당시 정부는 북한의 수공이 개시될 경우 63빌딩의 절반이 잠길 수 있다는 예상을 내놓기도 했다.
이렇게되자 국민들은 평화의 댐 공사를 위한 성금기탁에 줄을 섰고, 재계 역시 성금을 내놓아야 했다. 물론 청와대는 성금은 어디까지나 기업이 자발적으로 내는 것이며, 강제성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기업들로선 그런 정부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당시 전경련은 이를 두고 수차례의 회의를 거듭했다. 80년 당시 한국 경제는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연간 두 자리수의 성장률을 보이던 경제상황이 1, 2차 오일쇼크의 후유증과 중동건설 경기 퇴조로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률을 보였다. 긴축경제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경기는 침체일로를 걷고 있었다. 때문에 기업들로선 성금을 내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오랜 회의 끝에 전경련은 일단 성금액수를 그룹의 규모에 따라 차등분배하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결론은 4대 재벌은 50억원을, 10대 재벌은 20억원을, 20대 재벌은 10억원을 각각 내기로 했다. 이럴 경우 세칭 4대재벌인 현대, 삼성, LG, 대우는 50억원을 내야 했고, 당시 재계서열 6위권이던 한진은 20억원을 내야 했다. 이런 할당은 전경련 회장이던 정주영 회장이 주도했다.
어쨌든 전경련은 정해진 날짜에 성금을 모아 청와대로 보냈다. 그런데 성금이 전달된 뒤 얼마되지 않아 정 회장은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성금액이 당초 전경련이 통보한 액수보다 80억원이나 더 많다는 것이었다. 누군가 성금액을 할당액보다 80억원이나 더 낸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전경련에서는 때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누가 성금액을 더 많이 냈는지 밝혀내는 작업이 은밀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누군지는 밝혀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전경련 회장단은 각 그룹에 얼마만큼의 성금을 냈으면 좋겠다는 의견만 제시했을 뿐 돈은 각 기업이 알아서 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일로 정주영 회장과 조중훈 회장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정 회장은 성금을 더 낸 사람이 조 회장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정 회장은 대선에 출마하던 지난 92년 기자를 직접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비화를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당시 정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성금은 그야말로 성금이다. 기업들이 각자 알아서 낼 일이지만 당시 분위기는 기업의 규모에 따라 적정하게 내는 게 좋다는 것이 회장단의 생각이었다. 형편이 되면 더 낼 수도 있고, 형편이 안되면 적게 낼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규모가 적은 기업에서 더 많은 성금을 내면 결과적으로 큰 기업은 그보다 더 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때문에 묵계에 가까운 나름대로의 룰을 어긴 것은 재계 전체를 어렵게 만드는 일이었다. 재계의 화합을 저해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 회장이 왜 이 문제로 조 회장과 갈등을 겪게 됐는지는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 회장이 성금을 더 낸 주인공이 조 회장이라고 믿으면서 갈등이 시작됐고, 나중에는 전경련 모임에 조 회장이 참석하지 않는 상황으로까지 번졌다. 실제로 조 회장은 작고할 때까지 전경련에 비협조적이었다. 조 회장의 지시로 전경련 소속사들이 내는 회비마저 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 회장은 정주영 회장이 작고하자 청운동 자택에 마련됐던 빈소를 몸소 찾았다. 당시 조 회장은 암으로 투병중이었다. 그 자리에서 조 회장은 서로 존경하면서도 생전에 화해하지 못했던 일을 늦게나마 후회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선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