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삼 씨 국민방위군 배치 뒤 총 맞고 사망했지만 그 아들은 60년 넘도록 보상 못 받고 속앓이
올해 74세인 정석주 씨에겐 중학생 시절 기억이 생생하다. 친구들과 싸움이 나면 종내 말문이 막히는 건 언제나 정 씨였다. 서러웠다. 가장이 없는 농촌 집안의 형편 또한 좋을 리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학비를 대기 위해 5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장에 나갔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낮이면 장에서 팔 멍석을 짚으로 엮어 만들었고, 저녁이면 시아버지 술상을 봐야 했다.
아버지 정두삼 씨가 국민방위군에서 근무했다는 내용이 담긴 진양군 면장의 증명서. 과거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안 정석주 씨는 중학생 신분으로 아버지 명예를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사진=정석주 씨 제공
정 씨는 방황도 많이 했다. ‘애비 없는 자슥’이라는 말에 울분을 못 이겨 집 대문을 부숴버리기도 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는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경남 진양군(현재는 진주시와 통합된 과거의 행정구역)에 살던 그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내빼기도 했다. 고생하는 어머니를 더는 볼 수가 없어 공장에 취업하려던 생각이었다. 어머니 만류에 다시 돌아오기는 했지만 그의 70년 넘는 삶은 항상 팍팍했다.
“느그 아부지는 전사했는데 왜 학비를 내노?” 정 씨는 중학교 선생님의 말을 듣고 어머니께 아버지의 죽음을 물었다. 정 씨에겐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였다. 정 씨가 4세 때였던 1951년 어느 날이었다. 정 씨 아버지 정두삼 씨는 집으로 찾아온 군인 3명에게 ‘홀치기’를 당했다. 그때 나이 25세였다. 홀치기는 경상도 방언으로 눈에 보이는 사람을 무조건 끌고 간다는 뜻이다. 어딜 가냐고 물으니 “그냥 갈 데가 있으니 가자”는 말이 전부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당시 정부는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설치법을 만들고 제2국민병을 소집했다.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사람은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거나 군 복무 경험이 전혀 없는 만 17세부터 만 40세까지의 남자였다. 현역, 예비역, 후비병역, 호국병역, 제1보충역, 제2보충병역, 제1국민병역까지 군 복무 경험이 있거나 군 복무에 적합한 인원을 징집을 한 뒤 마지막에 쥐어짜내 징집한 것이 제2국민병역이었다. 총을 들 수 있는 남자라면 모두 전쟁에 끌려간 셈이다.
교통·통신이 지금 같지 않던 시절이었다. 정부는 당시 제대로 병력 소집이 이뤄지지 않자 가두모집하거나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강제로 징집했다. 당시 전국에 이렇게 끌려간 사람만 68만 350명이었다. 정두삼 씨도 그 가운데 한 명이었다.
정 씨는 경남 진주시 시내의 진주중학교에 주둔했던 국민방위군 제14단 본부에 배치됐다. 정 씨가 군복을 입고 진주 시내에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긴 했지만 누구도 정 씨가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갔다는 정확한 정보를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 발견한 사실이지만, ‘국민방위군 제14단 본부 사무소에서 3월 18일 새벽 4시 사망’이라고 적힌 정 씨의 제적등본이 나왔다. 다행이었다.
2003년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천변에서 발굴된 44구의 국민방위군 유해 합동영결식 모습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정 씨의 기록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다행인 이유가 있다. 당시 진주의 국민방위군 제14단에 소속된 인원은 9909명이었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진주 시내가 쑥대밭이 되는 바람에 대부분의 기록은 사라졌다. 추경화 진주문화원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진주 시내 90%가 파괴되면서 호적이든 등기부등본이든 대부분의 자료가 소실됐다.
장상환 논문의 ‘한국전쟁기 진주 지역의 사회 변동’을 보면 1950년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미군의 대대적인 진주 시내 폭격이 있었다. 진주시청, 진주경찰서, 진주고, 진주여고 등 큰 건물이 모두 무너졌고, 국보였던 촉석루도 불탔고, 남강교도 폭파됐다. 국민방위군은 군번을 부여받은 군인이 아니기 때문에 국방부에서 따로 기록을 보관하지 않는다. 관공서의 기록이 사라지면 생전 활동을 증명하기 어렵다.
제적등본이 아니더라도 정두삼 씨가 전사했다는 사실은 당시 마을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 씨는 끌려간 지 얼마 뒤인 1951년 3월 18일 주검으로 집에 돌아왔다. 당시 군인 셋이 총에 맞은 정 씨의 시신을 인계하고 돌아갔다. 가족은 장례를 치르고 마을 뒷산에 그의 묏자리를 마련했다. 그게 다였다. 그를 끌고 갔던 정부나 군은 그의 죽음을 위로하거나 보상하지 않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정두삼 씨가 전투 중 사망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충분한 정황은 있었다. 당시 진주는 북한 인민군의 집중 공격을 받던 곳 가운데 하나였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로가 차단된 인민군(패잔병, 구빨치산, 인공부역자)은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김종준의 논문 ‘한국전쟁기 서부경남지역 빨치산의 조직과 활동’에 따르면 인민군 유격대는 밤만 되면 시내로 내려와 민가와 관공서를 습격했다. 당시 방화, 약탈, 납치, 살상 등이 자행됐는데, 1951년 봄까지 계속됐다.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빨치산’이라는 단어는 이때의 인민군 유격대를 일컫는 말이다.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 자료집’을 보면 1950년 10월부터 1951년 6월까지 인민군 유격대 전투 현황을 집계해보면 경남 지역에서만 총 1808회 전투가 벌어졌다. 특히 정두삼 씨가 사망한 1951년 3월 한 달 동안은 공격 13회, 기습 8회, 복격 33회 등 총 54회의 전투가 있었다.
국민방위군 본부인 진주중학교를 지키던 정두삼 씨는 새벽 4시에 총을 맞고 사망했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볼 때 전투 중 사망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의 판단이다. 군사망위는 정두삼 씨가 순직 혹은 전사 요건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국방부에 사건을 넘기고 국방부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과거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안 정석주 씨는 중학생 신분으로 아버지 명예를 되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아버지의 제적등본을 확인하고, 아버지가 전투 중 사망했다는 내용이 담긴 진양군 면장의 증명서도 뗐다. 병무청, 보훈처의 돌아온 대답은 “신청 시기가 지났다”였다. 당시 국방부는 1955년 국민방위군에 소속됐다가 사망한 사람들에게 현역 군인과 동일한 사망급여금을 지급하는 ‘국민방위군 전사자 등록행사’를 진행했다. 1955년 4월 21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당시 유가족 등록 기간은 같은 해 5월 10일부터 6월 10일까지 한 달에 불과했다. 방법이 없던 정 씨는 평생 속앓이를 해왔다.
정석주 씨는 중학생 신분으로 모았던 자료를 60년이 넘도록 고이 간직해왔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면장한테 받은 증명서, 탄원서를 지금까지도 갖고 있어요. 아버지가 없어서 당한 경제적·사회적 설움은 끝도 없죠. 얼굴이 기억도 안 나고, 남아 있는 사진도 없어서 얼굴을 모르지만 아버지 명예를 되찾아서 평생의 한을 풀었어요.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정말 고맙습니다. 국방부는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판단해주길 바랍니다. 마지막 판단이 나오면 아버지, 어머니 산소에 가서 ‘내가 이렇게 했다’고 인사를 드릴 겁니다. 이제 죽어도 원이 없어요.”
정두삼 사건을 담당한 한상미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3과 2팀장은 “국가의 필요에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평생을 힘겹게 살았고, 그 가족도 마찬가지”라며 “정두삼 씨 같은 경우는 기록이 남아 있어 진상규명이 이뤄졌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더 많을 거다. 국민방위군폐지법이 통과한 1951월 5월부터 국민방위군이 공식 해체된 시점까지 발생한 사망, 실종 전반적인 실태를 전수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