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고리 절단용 실탄창고 채우기?
▲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C&C 주식을 담보로 거액을 대출 받아 재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
최태원 회장은 최근 본인 명의의 SK C&C 주식 2225만 주(지분율 44.5%) 중 401만 696주(8.0%)를 담보로 지난해 SK C&C의 상장 주관사였던 우리투자증권으로부터 대출을 받았다. 담보로 맡긴 주식 가치는 3700억~3800억 원 정도로 추산되며 대출 금액은 절반 수준인 약 1800억 원인 것으로 알려진다.
최 회장의 SK C&C 주식은 그가 그룹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근간이다. SK C&C가 지주사인 SK㈜를, SK㈜가 SK텔레콤 SK네트웍스 등을 지배하는 형태로 SK그룹 지배구조가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중요한 SK C&C 주식을 담보로 거액을 융통해온 최 회장의 속내에 재계의 시선이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
최 회장은 이에 앞선 지난해 2월에도 SK㈜ 주식을 대거 처분해 주목을 받았다. 당시 최 회장은 보유 지분 104만 787주(2.22%) 중 1만 주만 남기고 103만 787주(2.19%)를 블록딜(대량매매) 형식으로 매각했다. 주당 8만 9300원에 팔았으며 총 매각대금은 약 920억 원이었다.
최 회장이 계열사 지분을 팔아 거액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은 SK그룹이 지주회사제 전환을 발표한 2007년부터다. 그해 7월 최 회장은 보유하고 있던 SK케미칼 주식 전량(보통주)을 처분했다. 121만 4269주(5.86%)를 시간 외 거래를 통해 기관투자자에게 매각했는데 주당 8만 510원으로 매각대금은 총 978억 원이었다. 이듬해인 2008년 2월엔 SK건설 주식마저 모두 처분했다. 최 회장 보유 지분 37만 1659주(1.51%)를 재무투자자에게 주당 5만 3000원에 매각했으며 총 매각대금은 197억 원이었다.
단순 계산으로 최 회장은 2007년 이후 지분 매각과 대출 등으로 마련한 현금 3895억여 원을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다.
거액을 쟁여놓은 최 회장의 시선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재계에서 우선 거론되는 것은 바로 순환출자 해소에 최 회장이 사재를 털어 넣을 가능성이다. 현재 SK그룹은 ‘최태원→SK C&C→SK㈜→SK텔레콤 등 계열사’ 형태로 지배구조가 이뤄져 있다. 아울러 SK텔레콤이 SK C&C 지분 4.1%(205만 주)를 갖고 있어 순환출자 형태를 띠고 있다.
SK그룹은 내년 6월까지 지주회사제 요건 충족을 위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야 한다. 2007년 지주회사제 전환을 선언한 SK는 공정거래법에 따라 전환 발표 후 2년 내(2009년 6월) 지주회사제 요건을 충족시켜야 했으나 이를 완료하지 못했다. 결국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2년 유예를 받아 내년 6월까지 지주회사제 요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상황이다.
재계 일각에선 지분 매각과 담보 대출 등으로 거액을 마련한 최 회장이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SK텔레콤이 보유한 SK C&C 지분 4.1%를 사들일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11월 11일 SK C&C 종가 9만 1500원 기준으로 환산하면 SK텔레콤이 보유한 SK C&C 지분의 시가총액은 약 1876억 원이 된다. 최 회장이 손에 쥔 자금 중 최근 SK C&C 지분으로 담보대출을 받은 금액과 엇비슷하다.
종전까지 SK C&C 지분 450만 주(지분율 9%)를 갖고 있던 SK텔레콤은 지난달 8일 장외 매도로 245만 주(4.9%)를 쿠웨이트 정부에 매각하면서 지분율을 지금의 4.1%까지 낮춘 바 있다. SK텔레콤의 지분 매각 직후 최 회장의 담보 대출이 이뤄진 점과 SK텔레콤 보유 지분 시가총액이 최 회장 담보 대출 금액과 비슷한 점을 들어 최 회장이 SK텔레콤 보유 SK C&C 주식을 사들이기 위한 수순 밟기가 진행돼 왔다고 보는 것이다. SK텔레콤이 애초부터 보유하고 있던 SK C&C 지분 9%를 최 회장이 모두 사들이기엔 부담이 컸으므로 일부를 매각한 뒤 나머지를 최 회장이 사들여 책임경영 이미지를 부각시킬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그동안 최 회장은 지주사 SK㈜ 대신 개인회사나 다름없는 SK C&C를 통해 그룹을 지배해온 것에 비판을 받아왔다. 재계에선 최 회장이 SK텔레콤이 보유하고 있는 SK C&C 주식을 사들여 지주회사제 전환 작업의 방점을 찍을 경우 최 회장의 SK C&C 지분 보유를 둘러싼 그간의 논란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선 SK C&C와 SK㈜가 합병해 새 지주사를 만들고 최 회장이 이 회사의 최대주주가 되는 방안이 거론되기도 한다. 이 경우 최 회장은 이미 쌓아놓은 현금으로 새 지주사 지분을 넉넉하게 사들여 지배력 강화를 도모할 수 있다.
잡음 없는 합병을 위해선 두 회사의 주식 수나 주가가 엇비슷해야 한다. 현재 SK㈜의 발행주식 총수는 4696만 1812주이며 SK C&C는 5000만 주로 큰 차이가 없다. 문제는 주가 차이다. 11월 11일 현재 SK㈜ 종가는 12만 9000원. SK C&C 종가 9만 1500원과는 3만 7500원의 차이를 보인다. 그런데 최 회장의 담보대출 소식과 SK C&C 지분 매입 전망이 전해지면서 SK C&C 주가가 연일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다. 최 회장이 아직 SK C&C 지분을 추가 매입한 게 아닌데도 이미 증권가에선 최 회장이 주식을 사들인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순환출자 해소를 위해 최 회장이 거액의 사재를 선뜻 내놓을지에 대해 비관적 전망을 내놓는 시선도 있다. 이미 SK C&C 지분 44.5%를 갖고 있는 최 회장이 지분 추가 매집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는 만큼 SK텔레콤이 보유한 SK C&C 지분을 SK C&C가 사들이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포스코나 하나금융지주 같은 외부 세력이 SK텔레콤이 보유한 SK C&C 지분을 사들일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그동안 최 회장이 지분 매각 등을 통해 거액을 마련할 때마다 자금의 용처를 두고 말들이 많았지만 SK 측은 “(최 회장의) 사적인 재산 문제는 알 수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4000억 원에 가까운 현금 보따리를 쥐고 있는 최 회장은 과연 지분 매입을 통해 책임경영 명분을 축적하려 할까, 아니면 다른 투자처를 향해 움직이게 될까. 재계의 궁금증은 커져만 가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