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대로 역사 왜곡에 ‘또’ 중국풍 한 스푼…논란마다 “상상력”이라면 용서될까
첫 방송 직후 역사왜곡과 ‘중국풍’ 문제로 논란을 빚은 SBS 새 월화드라마 ‘조선구마사’. 사진=SBS 제공
지난 22일 첫 방송한 SBS 월화드라마 ‘조선구마사’는 역사 왜곡과 뜬금 없는 ‘중국풍’의 등장으로 시청자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한국형 엑소시즘 판타지 액션 사극 드라마’라는 긴 장르 타이틀을 선보인 ‘조선구마사’는 조선 초기를 배경으로 인간의 욕망을 이용해 조선을 정복하려는 서역 악령과 이에 맞서 백성을 지키려는 태종 이방원(감우성 분), 충녕대군(장동윤 분), 양녕대군(박성훈 분) 등 인간의 혈투를 그린다.
최근 대중들이 영화·드라마의 역사 왜곡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만큼, ‘조선구마사’는 방영 전부터 예의 주시돼 왔다. 특히 ‘조선구마사’의 각본을 맡은 박계옥 작가의 전작 tvn 토일드라마 ‘철인왕후’에서도 역사 왜곡 논란이 불거졌기에 같은 작가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듯 ‘조선구마사’ 역시 첫 화부터 시청자들의 분노를 샀다. 가장 먼저 지적을 받은 장면은 태종 이방원이 환영에 홀려 백성을 도륙하는 신이었다. 외척이나 공신들은 악독하리만치 처단했던 이방원은 백성들에게만큼은 관대한 임금으로 유명했다. 실록으로도 남겨져 있는 그의 관대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채 광인으로 묘사한 것을 두고 시청자들의 거센 비난이 이어진 것. 앞서 박계옥 작가의 전작 ‘철인왕후’에서도 조선왕조실록을 일개 지라시로 표현했던 것까지 더해 비난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뜬금 없는 ‘중국 풍’의 등장도 문제였다. 충녕대군이 중국 국경 인근 지역까지 가 서역의 구마사제를 데려오는 과정에서 등장한 기생집 내부의 음식과 장식 소품들이 전부 중국풍이었다는 것. 중국 음식인 피단과 월병이 등장하는가 하면, 술병이나 내부 장식들 역시 중국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등장하는 기생들의 옷차림은 조선식인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설정을 두고 결국 시청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최근 중국 사극에서 배경은 중국으로 두되, 등장인물의 복장은 한복으로 바꿔 자신들의 의복이라고 주장하는 ‘문화침탈’ 행위로 민감해진 상황에서 지상파 방송이 중국과 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시청자들의 지적이었다. ‘조선구마사’ 시청자 게시판에는 순식간에 제작진을 성토하는 글들이 가득찼다.
작중 등장한 기생집에서 중국 음식인 월병과 피단, 중국식 장식품 등이 등장해 시청자들의 항의가 이어졌다. 사진=‘조선구마사’ 캡처
이에 제작사 측은 23일 공식입장을 내고 “충녕대군이 중국 국경까지 먼 거리를 이동해 서역의 구마사제를 데려와야 했던 상황을 강조하기 위해 ‘의주 근방’(명나라 국경)이라는 해당 장소를 설정했다”며 “명나라 국경에 가까운 지역이다 보니 ‘중국인의 왕래가 잦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력을 가미해 소품을 준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이 역시도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게 뿔난 시청자들의 주장이다. 한 시청자는 “당시 의주는 고려시대 서희의 외교 담판 이후부터 거란족, 여진족 등 유목민족이 주로 거주하던 곳이었다. 또 시기상 명나라도 건국 초기였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중국 풍’이 정립되기 전이므로 원나라의 색이 더 강해야 맞다”라며 “본인들 편한 대로 상상력이라고 주장할 게 아니라 실존 인물을 그대로 이용해서 작품을 만들 거라면 최소한의 역사적 지식이나 진실은 유지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쓴소리를 날렸다.
‘조선구마사’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의 경우도 조선시대와 좀비물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두 키워드를 합쳤지만 오히려 국내외를 막론하고 대중들의 많은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이는 ‘킹덤’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대체 역사’라는 점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대상만 조선일 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부 모티브가 있다 하더라도 철저한 가상 인물로 꾸몄다. 이 때문에 실제 역사와 반대되는 스토리를 택했더라도 큰 비판 없이 ‘드라마적 상상력’으로 받아들여진 바 있다. 비슷한 장르의 영화 ‘창궐’ 역시 실존 인물에서 살짝 비틀어 새로운 조선시대 인물을 전면에 내세웠다.
SBS ‘조선구마사’ 공식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에는 23일 오후 기준 1300여 개의 항의글이 쏟아졌다. 사진=‘조선구마사’ 시청자게시판 캡처
그러나 ‘조선구마사’는 비슷하게 역사적 사실에 반하는 판타지를 표방하면서도 실존 인물을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지적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제작진은 이 같은 실존 인물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 “완벽한 허구를 지향할 경우 이 드라마가 구현해야 할 공포의 ‘현실성’을 앗아갈까 걱정됐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없다. 악령과 구마라는 비현실적이고 상상력 넘치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현실성을 중요시 하기 위해 실존 인물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러면서 “태종, 충녕대군, 양녕대군 세 사람이 가진 이면과 욕망의 층위가 이 드라마의 핵심이다. 생시와 흡혈, 구마와 같은 판타지적 요소가 드라마를 끌고 가지만 결국 모든 공포는 바로 인간들 사이의 관계와 속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이 같은 인터뷰 내용이 ‘조선구마사’ 첫 방송 이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가상의 시대에서도 캐릭터 빌드업만 잘 된다면 충분히 인간 군상 속 현실적인 공포를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와 엑소시즘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키워드를 제대로 섞어낼 능력이 부족해 실존 인물을 이용해 왜곡하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일기도 했다.
판타지 장르에서는 상상력의 한계선을 두지 않으니 시청자들의 이 같은 비난 기류가 제작진의 입장에서는 난감하고 부당하다고 생각될 법도 하다. 그러나 최근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는 국내 드라마의 역사 왜곡 문제와 문화침탈을 강행하고 있는 중국의 자본 침투로 인해 국내 대중들이 매우 민감한 상태라는 점도 방송사와 제작진이 감안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에 대해 한 드라마 업계 관계자는 “비슷한 장르물인 ‘킹덤’의 경우 한국 역사나 문화에 무지했던 넷플릭스에게 적극적으로 우리 문화를 알리고, 한국적인 미를 강조하는 의상이나 화면 설정 등으로 해외 K드라마 팬들에게도 성공적으로 어필했다. 반면 마찬가지로 해외 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데다 케이블도 아닌 지상파 방송에서 과도한 역사 왜곡이나 중국 풍을 슬쩍 집어넣고 있으니 시청자들이 화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뿔난 시청자들은 박계옥 작가의 그간의 행적까지 정리하며 ‘친중국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박계옥 작가의 전작인 ‘철인왕후’는 극중에서 풍양 조 씨 가문인 신정황후 조 씨를 무속신앙에 과도하게 심취한 인물로 표현하면서 그 후손들인 풍양 조 씨 문중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은 바 있다. 이에 작품에 등장하는 풍양 조 씨, 안동 김 씨 등 실존 가문을 풍안 조 씨와 안송 김 씨로 바꾸는 등 모두 가공의 인물로 변경 후 3회부터 ‘모든 등장인물과 사건 등은 허구’라고 밝히며 가공의 역사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같은 작가의 비슷한 논란이 이번 ‘조선구마사’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무마될 것인지에 관심이 집중된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