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 코는 뀄는데 외양간이 비좁다
▲ 현대건설을 되찾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 18일 정주영, 정몽헌 회장의 묘소를 참배한 뒤 그룹 임원진과 걸어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소식이 알려진 지난 16일 현대그룹 관련주들이 일제히 급락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가격으로 당초 예상된 4조 원대를 크게 웃도는 5조 5100억 원을 써낸 사실이 알려지면서 현대그룹의 뒷감당을 우려하는 이른바 ‘승자의 저주’ 심리가 퍼진 것이다. 재계와 증권가에선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했다가 워크아웃을 초래한 일을 비교선상에 올려놓고 있다. 또 한화가 대우조선해양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가 자금난 때문에 인수 포기 선언을 한 일도 심심치 않게 비교된다.
5조 5100억 원 중 현대그룹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으로 조달할 금액은 1조 5000억 원. 인수가격의 27%에 불과하다. 나머지 4조 100억 원은 현대상선 등 주요 계열사의 회사채 발행과 유상증자, 일부 지분 매각 그리고 외부 재무 투자를 통해 끌어올 계획이다. 현대건설 인수전을 지켜본 재계의 시선은 과연 현대그룹이 4조 원 넘는 돈을 외부에서 탈 없이 조달할 수 있을지로 향하고 있다.
특히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당일에야 알려진 1조 원대 프랑스 은행 예치금의 정체가 가장 큰 주목을 받고 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채권단에 제출한 인수자금 조달 증빙서류엔 현대상선 프랑스 법인이 나티시스은행에 예치한 1조 2000억 원(11억 달러)이 포함돼 있다. 자산규모가 33억 원대에 불과한 현대상선 프랑스 법인이 이 같은 거액을 예치해 놓은 배경에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현대그룹이 지난 4월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으로부터 재무구조 개선약정(재무약정) 대상으로 선정되는 수모를 당할 때도 해외법인에 이 같은 거액이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증권가엔 이 자금이 현대상선이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대그룹과 지분 계약을 맺은 넥스젠캐피탈의 돈이란 소문도 있다.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를 반대해온 현대증권 노동조합(노조·위원장 민경윤)은 지난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증권가 소문이 사실일 경우) 현대그룹은 나티시스은행을 전략적 투자자로 유치한 게 아니라 전형적 투기자본인 넥스젠캐피탈로부터 자금을 차입한 것에 불과하다”며 “(채권단은) 나티시스은행 계좌 자금의 실체를 밝혀라”라고 촉구했다.
이에 대해 현대그룹 측은 “현대증권 노조의 주장은 사실과 전혀 다른 추측에 불과하며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으로 입찰 방해 행위로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자금조달 증빙에 대한 판단은 채권단에서 이미 최종 결론 내린 것으로 입찰참가자나 그밖의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도록 매각 규정에 명시돼 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현대그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일부 현대상선 소액주주들은 “현대상선 프랑스법인이 직전분기까지 공시에 없던 거액을 자기자본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동안 허위공시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면서 금융감독원에 특별감리를 요청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국세청에 세무조사 요청도 저울질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등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에 재무 투자자로 참여한 동양종금증권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현대증권 노조는 “동양그룹은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으며 동양종금증권도 PF(프로젝트 파이낸싱) 펀드 손실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며 현대그룹에 대한 현대건설 인수 자금 투자에 대해 “정상적인 투자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동양종금증권은 올 상반기 적자를 기록했으며 그룹 주력사인 동양레저와 동양메이저는 지난 2007년 이후로 줄곧 적자에 허덕이고 있다. 때문에 동양그룹은 최근 동양생명보험 지분을 매각하는 등 고강도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건설 인수를 위한 외부 자금 못지않게 현대상선의 인수자금 유치과정 역시 관심의 대상이다. 현대건설 인수 과정에서 외부 투자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현대그룹이 내부에서 가장 믿을 만한 자금줄은 사실상 현대상선뿐이다. 현대그룹은 현대건설 채권단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현대상선의 회사채 발행과 자회사 지분 매각, 자사주 신탁 계약 해지 등으로 마련된 9560억 원이 곧 채권단에 입금될 것이라 밝힌 상태다. 현대그룹은 현대상선 유상증자를 통해 4000억 원, 기업어음 발행으로 4500억 원을 추가로 마련할 계획이다.
이 가운데 현대상선 유상증자 계획은 현대건설 인수전 과정에서부터 많은 이슈를 낳았다. 현대상선의 최대주주는 정몽준 의원이 대주주인 현대중공업(지분율 22.14%)이다. 현정은 회장은 현대그룹 계열 현대엘리베이터가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 20.60%와 함께 케이프포춘(5.75%) 등 국내외 자본과의 계약으로 현대상선 경영권을 유지해오고 있다. 현대그룹 순환출자구조의 핵심인 현대상선 지배권이 외부에 넘어갈 경우 현 회장의 그룹 경영권 또한 흔들리게 된다. 이런 가운데 현대건설 본입찰을 앞두고 발표된 현대상선 유상증자 계획은 현대건설 인수 자금 조달과 더불어 현 회장의 지배력 강화 도모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현대상선 유상증자 계획엔 커다란 변수가 있다. 최대주주인 현대중공업의 참여 여부다. 현대중공업 주변에선 “(유상증자에 참여해서) 굳이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 자금을 대줄 필요가 있느냐”는 내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만약 현대중공업이 증자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발생할 거액의 실권주를 현대그룹과 재무 투자자들이 끌어안는 과정에서 발생할 재무 부담과 주가하락이 우려된다.
자금 조달에 대한 이런저런 우려들은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자산 매각에 나설 것이란 관측으로 이어졌다. 과거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한 뒤 대우건설 빌딩을 팔아 자금을 조달했던 전례에 빗댄 것이다. 이에 대해 현정은 회장은 지난 18일 경기 하남시 창우동의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 묘소를 찾은 자리에서 “현대건설 계열사나 자산을 매각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현대그룹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그룹 위상이나 규모를 고려해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금 조달계획을 제출했으므로 ‘승자의 저주’는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현대건설이 지분 72.55%를 보유한 현대엔지니어링의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 가능성도 높게 거론된다. 이에 대해 지난 18일 현 회장은 “실사 후 검토하겠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현대건설 자산 매각에 대한 우려가 빗발치고 이에 대해 현 회장이 “그럴 일 없다”고 못 박은 데다, 현대건설 채권단도 현대그룹과 현대건설 인수 후 2년간 현대건설의 주요 자산 매각을 제한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할 예정이라고 밝힌 만큼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자산 매각에 나서기는 어렵다. 이렇다 보니 일각에선 현대건설이 아닌 현대그룹 계열사나 자산 매각 가능성에 주목하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 증권가에선 지금껏 현대건설 인수전 자금 마련을 위해 끊임없이 회자됐던 현대증권 등 계열사 매각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실적 면에서 외부에서 탐낼 만한 현대그룹 계열사는 현대상선과 현대증권 정도인데 현대상선은 그룹 주력이자 현대건설 인수 주체의 핵심이므로 현대증권이 잠재적 매물로 거론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룹 수뇌부가 계열사 매각설을 부인하고 있는 데다 지난해 1800억 원 순이익을 기록한 현대증권을 팔아넘길지 의문이다.
때문에 일각에선 현대상선이 가진 현대증권 지분 23.17%(19일 종가 기준 시가 5000억 원대)을 현대건설에 매각하는 시나리오를 제기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그룹은 현대건설을 인수하더라도 현대건설 자산에 손을 댈 수 없다. 그러나 계열사 지분 거래는 얘기가 다르다.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현대그룹으로선 현대증권 지배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수천억 원에 이르는 현대건설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셈이다.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를 둘러싼 여러 소문들에 대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소문 내용보다 출처가 더 의심스럽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인수전에 패한 현대차가 악의적 루머를 퍼뜨릴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현대그룹 측은 더 나아가 지난 19일 보도자료를 내고 “자금조달 증빙과 관련하여 언론에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현대차그룹에 대해 예비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해 줄 것을 매각주간사에 공문으로 요청했다”며 공세를 취했다.
지난 2003년 남편 정몽헌 회장 타계와 현대가와의 갈등, 금강산 관광 중단, 재무약정 선정 등의 악재를 극복하고 천신만고 끝에 현정은 회장은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우리를 시기하는 시선이 많다”는 현대그룹 관계자의 말처럼 현 회장이 현대건설의 주인이 되기 위한 가시밭길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 정몽구 회장. |
승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번 현대건설 인수전 결과와 관련해 현대차그룹 측은 “최선을 다했지만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했다”며 “현대건설의 견실한 발전을 기대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속내도 그러할까. 현대그룹이 당초 예상을 크게 웃도는 5조 5100억 원을 써내면서 현대차의 5조 1000억 원에 앞선 데다 비가격 요소를 합해 100점 만점에 1점 미만의 차이로 승패가 갈렸다는 소식에 현대차 관계자들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대차의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는 시아주버니(정몽구 회장)와 제수(현정은 회장) 간 대결이란 점 외에도 현대차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된 여러 해석을 낳으며 주목을 받았다. 정 회장의 아들 정의선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건설 계열사 현대엠코가 인수주체가 될 가능성이 거론된 까닭에서다. 현대차그룹 내 주요 계열사 지분율이 턱없이 모자란 정 부회장이 엠코-현대건설 합병법인을 발판 삼아 경영권 승계를 굳히려 할 것으로 전망되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9월 1일 계열분리 10주년을 맞아 비전 선포식과 대대적인 행사를 하려다 정몽구 회장 지시로 이를 무기한 연기했는데 현대건설 인수를 염두에 둔 조치로 여겨지기도 했다. 당시 재계에선 정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 성사 후에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정통성 계승과 정의선 부회장의 후계를 공고히 하는 의미의 대대적인 행사 개최를 구상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정 회장의 기대가 컸을 것으로 보이는 현대건설 인수전에서 우선협상대상자 자리를 빼앗긴 만큼 책임 추궁 형식의 대형 인사가 예상되고 있다. 재계와 금융권에 “현대차의 입찰가가 현대그룹 측에 새어 나갔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는 만큼 기강잡기와 동시에 정 부회장의 승계 안착을 위한 대대적인 세대교체형 인사가 전망된다.
한편 재계와 금융권에선 “현대차가 아직 인수전이 끝나지 않았다고 보고 있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현대그룹이 인수금액 중 4조 원 이상을 외부에서 끌어와야 하는 입장인 만큼 변수가 따를 것으로 보는 것이다. 현대건설의 주채권은행이면서 현대그룹 주거래은행이기도 한 외환은행이 지난 4월 현대그룹 재무약정 선정을 이끌었고 이후 현대그룹과 줄곧 감정대립을 벌여온 점을 눈여겨보는 시선이 많다.
현대차에 마음이 기울어 있던 현대건설 채권단이 현대그룹 입찰가가 높게 나타나자 특혜 시비 차단을 위해 일단 현대그룹 손을 들어줬지만 현대차를 예비협상대상자로 선정해 여지를 뒀다는 것이다. 재계 정보통들은 “대우조선해양 우선협상대상자가 됐다가 인수를 포기한 한화그룹보다 현대그룹의 자금 사정이 낫다고 볼 수 있느냐”며 “채권단과 현대차의 움직임을 여전히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우선협상대상자 선정은 끝났지만 현대건설을 둘러싼 현대그룹과 현대차 양측의 신경전은 계속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