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회 제재·코로나 유행으로 고육책 꺼내…“시장경제 환경에서 자란 젊은 세대 반발 커질 수도”
4월 8일 제6차 조선노동당 세포비서대회 폐회식에서 ‘고난의 행군’을 선언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연합뉴스
“나는 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해 각급 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 전진 도상에 많은 애로와 난관이 가로놓여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당 제8차 대회 결정 관철을 위한 투쟁은 순탄치 않다. 그 어떤 우연적인 기회가 생길 것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4월 9일 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한 김정은의 발언 내용이다.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 사업총화 보고 이후 5년 만에 ‘고난의 행군’을 언급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은 북한 지도부 입장에선 최후의 수단이다. 배수의 진을 치고 어느 정도 희생까지 감내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이 항일 빨치산 활동을 펼치던 중 일본군 토벌을 피해 혹한과 굶주림을 참으며 100여 일 동안 행군한 데서 유래한 단어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북한 인민군 내부에서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려는 수단으로도 쓰였다고 알려졌다. 국제사회에서 고난의 행군은 김정일 집권 시기 극도의 경제난 당시 북한 지도부가 내건 슬로건을 일컫는 것으로 통용된다.
한 대북 소식통은 1990년대 중반 김정일 집권 시기 고난의 행군을 언급하며 지금 북한의 상황이 그 당시와 비슷하다고 했다. 그는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남북관계를 비롯해 북한의 대외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김정일 전 북한 국방위원장이 당에서 내놓은 구호가 바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했다. 소식통은 “당시 북한은 내부적으론 흉년이 들어 대기근에 시달려 아사자가 속출했고, 대외적으론 ‘한반도 평화무드’가 깨지며 경제에 비상이 걸렸다”고 했다.
소식통은 “고난의 행군 당시 북한의 경제난은 통상적인 수준이 아니었다”면서 “북한 내부 주민들의 생명 보장조차 위태로웠던 상황”이라고 했다. 그는 고난의 행군에 대해 “나라가 어려우니 인민들이 참으라는 메시지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한마디로 배급 끊을 테니 알아서 ‘자력갱생’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전했다.
2015년 5월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고난의 행군 당시 꽃제비들의 참상을 탈북민 대학생들이 재현하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고난의 행군을 경험했던 탈북민 이 아무개 씨는 “고난의 행군이라는 것은 나라의 시스템이 마비됐다는 사실을 예쁘게 포장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고난의 행군 당시의 참상은 직접 그 현실을 마주하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라면서 “사람들이 식욕이라는 근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다른 것은 고려하지도 않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했다.
“꽈배기 빵 같은 먹을 것을 파는 곳 주변을 노숙자들이 배회한다. 노숙자들은 틈을 보다 점포에 달려들어 먹을 것을 입에 넣었다. 이들이 단속반에 제압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단속반에 구타를 당하면서도 먹을 것을 계속해서 입에 구겨 넣었다. 맞는데도 얼굴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맞는 아픔보다 먹는 것의 행복이 큰 셈이었다.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들도 먹을 것이 없어 산나물을 뜯어먹다 풀독이 올라 얼굴이 퉁퉁 붓기도 했다.”
이 씨가 회상한 고난의 행군 당시 일상이었다. 이 씨는 “중소 도시 중심부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의 시체를 보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면서 “주민들 사이에선 ‘이건 나라도 아니다’라는 불평·불만이 속출했었다”고 회상했다.
복수 대북 소식통은 1990년대 최악의 경제난을 경험했던 북한 주민들에게 ‘고난의 행군’은 떠올리기 싫은 악몽과도 같다고 했다. 또 다른 대북 소식통은 “이제 ‘고난의 행군’은 내부 주민을 통제하는 데 효과적이지 않다”면서 “시대가 변한 상황에서 김정은 시대 고난의 행군 지속력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식통은 “1990년대엔 강 건너 중국이나 러시아를 보면 북한과 엇비슷한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는 이들이 눈에 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면서 “중국과 러시아 사람들도 풍족하게 사는 게 보이는데, 내부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선언하면 내부 민심에 상당한 동요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북한 관영 조선중앙방송이 공개한 고난의 행군 시절 영상 자료. 사진=연합뉴스
강철환 북한전략센터 대표는 “지금 시점에서 북한의 고난의 행군 선언은 종말 선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강 대표는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북한 사회가 가장 달라진 점이라면 ‘장마당’을 기반으로 한 시장 경제가 본격적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라면서 “고난의 행군 이후부터 ‘더 이상 나라가 개인의 안위를 챙겨줄 수 없구나’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개인이 살길을 개척해나가는 풍토가 정착했다”고 했다.
강 대표는 “현재 북한 젊은 세대는 시장 경제가 자리잡은 환경에서 자랐다”면서 “다시 한번 고난의 행군이 본격화될 경우 ‘내가 먹고 살겠다는데 나라가 무슨 간섭이냐’며 반발 심리가 커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대표는 “젊은 세대의 인식이 다른 상황에서 이전 세대에서 먹혔던 고난의 행군 카드를 다시 꺼낸 건 김정은의 무리수”라면서 “다시 한번 고난의 행군이 되풀이될 경우 북한 지도부는 주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 있다. 정권 유지가 최우선 목표인 북한 지도부 입장에선 ‘종말’을 앞당기는 고육책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