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동떨어진 꼰대’ 2030세대 분노…사업자 건전성 판단해야 할 은행권도 당혹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암호화폐 투자에 대해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은성수 금융위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4월 22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암호화폐 투자에 강력한 경고성 발언을 쏟아냈다. 은 위원장은 암호화폐 투자자 보호와 관련해 “하루에 20~30% 올라가는 자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오히려 투기로 가게 한다고 생각한다”며 “자기 책임으로 하는 것을 정부가 다 챙겨줄 수는 없다”고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는 “제도권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는 게 솔직한 심정”이라고 토로하기도 했고, “(2030세대가) 잘못된 길로 가면 어른들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고 말해 ‘꼰대’ 논란을 빚기도 했다.
암호화폐 투자자들은 은성수 위원장의 입장에 울분을 터트렸다. 2030세대를 중심으로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는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자진 사퇴를 촉구합니다’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여당에서도 질책의 목소리가 나왔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은 위원장의 위치와 파급력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발언의 가벼움’”, 전용기 의원은 “대체 무슨 자격으로 청년들에게 잘못됐니 아니니를 따지는 건가”라고 비판했다.
이들의 분노가 들끓는 가장 큰 이유는 암호화폐 시장 현실과 동떨어진 은성수 위원장의 인식 때문이다. 암호화폐는 개인‧기업의 투자 대상이 된 지 이미 오래고 산업 일부에 침투하고 있는 만큼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평가가 많다. 투자자들은 정부가 이 시장에 대해 법과 제도를 정비하면서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주기 원하는데, 금융당국 수장이 이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오히려 ‘투기’ ‘도박’ 등으로 치부하며 ‘가당찮은 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로 몰아붙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세금은 걷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 더 큰 분노를 샀다.
해외에서는 암호화폐 관련 사업이 이미 제도권 내로 진입했다.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는 비트코인에 투자했고 소비자들은 차량을 구매할 때 비트코인으로 결제할 수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도 비트코인 펀드를 준비 중이며 스타벅스도 디지털 지갑 애플리케이션 ‘백트’와 제휴해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받는다.
국내 기업들도 암호화폐에 우호적인 곳이 적지 않다. 최근 암호화폐 거래소 ‘빗썸’ 인수를 검토했던 국내 최대 게임사 넥슨은 지난 4월 28일 일본법인을 통해 비트코인 1717개를 매수했다고 밝혔다. 오웬 마호니 넥슨 일본법인 대표는 “자사의 비트코인 매수는 주주가치 제고 및 현금성 자산의 가치 유지를 위한 전략”이라며 “현재 글로벌 경제 환경에서 비트코인은 장기적으로 안정성과 유동성을 이어가고 미래 투자를 위한 자사의 현금 가치를 유지할 것으로 본다”고 투자 배경을 설명했다.
그런가 하면, 은성수 위원장이 “오는 9월 모두 폐쇄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대접도 시장에서는 전혀 다르다. 암호화폐 거래소 ‘업비트’를 운영하는 ‘두나무’는 지난 2월 한화투자증권으로부터 약 583억 원의 투자를 받았다. 한국거래소는 지난 4월 29일 두나무를 대표적인 ‘K유니콘 기업’으로 꼽으며 주식시장 상장 지원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우리나라 유통업계 일부에서 암호화폐는 현금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업비트와 코인원에 상장한 암호화폐 ‘페이코인’을 편의점‧외식‧영화관 등에서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또 다른 암호화폐 ‘밀크’도 여행·숙박 등을 즐길 때 결제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가상자산이 산업에 빠르게 침투하고 있다. 편의점과 영화관 등에서도 현금처럼 사용할 수 있다. 서울 강남구 빗썸 고객센터 내 암호화폐 시세판. 사진=박정훈 기자
2018년 암호화폐가 국내 투자시장을 한 차례 휩쓸고 간 뒤 정치권은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을 만들었다. 암호화폐 사업자의 지위를 정부의 공식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이 법은 지난 3월 25일부터 시행됐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암호화폐가 마침내 제도권으로 편입된다’는 기대감도 나왔다.
그러나 특금법이 시행됐음에도 금융당국 수장이 “잘못된 길”이라며 부정적 기조를 확고히 하자 암호화폐 사업자의 건전성을 판단해야 하는 은행권에서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며 당황스러워 하고 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미국 등 일부 국가에서는 증권거래소 차원에서 암호화폐를 관리하고 미래산업의 일부로 자리잡은 상황에서 은성수 위원장의 강경발언은 부적절했던 것으로 생각한다”며 “젊은 층에 대한 공감력도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암호화폐 시장은 이제 거스르기 힘든 추세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은 위원장과 금융당국도 이를 경고하고 ‘잘못’이라고 몰아붙일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 마련에 힘써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융당국이 손실을 보전해줄 수는 없지만 금융 사기나 이로 인해 피해가 발생할 때는 금융당국이 관리‧감독에 나서야 한다”며 “암호화폐를 이용한 자금세탁과 외환거래 우회, 조세회피 문제는 엄격하게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수진 기자 sj109@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