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경선 연기 통한 ‘판 흔들기’로 주도권 잡아야…이재명·지도부·여론 등 삼박자 맞아야 성공
친문(친문재인)발 대선 역전 시나리오가 잦아들지 않고 있다. 현실화 땐 여당 주류의 제3후보론과 맞물려 기존 대권 구도를 뒤흔들 전망이다.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인제 대세론’을 무너뜨렸던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의 재연이다. 최악은 비주류가 본선에 진출한 2007년 대선 경선판의 데자뷔다. 당시 친노(친노무현)계는 통합 신당을 만든 비주류에 힘 한번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2002년 대선이냐, 2007년 대선이냐.’ 승부는 시작됐다.
친문계 일각에서 거론되는 2002년 모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인제 대세론을 꺾었던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을 뜻한다. 이른바 ‘16부작 드라마’로 불리는 당시 경선은 한국 정당 경선에 국민참여경선을 도입한 첫 사례로 꼽힌다.
‘대의원 20%+당원 30%+일반 국민 50%’로 치른 새천년민주당 대선 경선에 참여를 신청한 유권자는 184만 명에 달했다. 이 중 3만 5000명이 일반 국민 50%에 배정됐다. 경쟁률만 52 대 1을 웃돌았다. 파격적 룰 도입은 노풍(노무현 바람)이 이인제 대세론을 격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친노(친노무현)계 한 관계자는 “국민참여경선이 없었다면, 노란 풍선의 열풍도 불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16개 시·도 순회 경선의 세 번째 지역인 광주 승리를 끝으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공고했던 이인제 대세론이 초반에 무너진 셈이다. 이인제 당시 후보는 전남 경선을 끝으로 역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 2002년 4월 17일 전격 사퇴했다. 이후 그는 노무현 음모론을 제기한 뒤 탈당했다.
그에 앞서 김근태 전 의원(3월 12일·이하 같은 달), 유종근 전 전북지사(14일), 한화갑 전 의원(19일), 김중권 전 의원(25일) 등도 줄줄이 사퇴했다. 주류였던 동교동계는 새로운 정치세력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와 국민개혁정당 등 신진 세력에 안방을 내줬다. 대선 경선 룰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다. 친문계가 제3후보론에 계속 미련을 두는 것도 ‘노란 풍선의 추억’과 무관치 않다.
노풍 재연을 꿈꾸는 친문계의 움직임은 최근 한층 빨라졌다. 물밑에선 연일 대선 경선 연기론을 띄운다. 공중전에선 당 정책이나 이슈 등과 묶어 룰 변경의 당위성 확보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최근엔 당헌 개정 없이 대선 주자들 합의로 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앞서 당 지도부는 “전 당원 의결 사항인데 쉽게 되겠냐”라며 부정적 의견을 표시했다. 비주류에선 무공천 원칙을 전 당원 투표를 통해 뒤집어 참패한 4·7 재보궐 선거의 데자뷔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자 당 주류는 “원칙의 훼손 없이 출구전략을 짤 수 있다”며 당 지도부를 압박했다. 대선 경선 연기론의 최전선에는 부산 친문인 전재수 의원이 섰다. 그는 “당헌 개정 없이 대선 경선을 연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당헌 제88조에 따르면 대권 후보 선출 데드라인은 ‘대선 180일 전’이다. 내년 3월 9일을 역산하면, 오는 9월 10일까지 본선 진출자를 가려야 한다. 다만 당헌에는 ‘상당한 사유’가 있을 땐 당무위원회 의결로 대선 일정을 변경할 수 있다는 예외 조항을 뒀다. 친문계가 전 당원 투표를 통한 당헌 의결 없이도 ‘대선 180일 전→120일 전’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논리적 근거도 이 지점이다.
송영길호의 입장 변화도 감지됐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6월 2일 국회에서 ‘국민소통 민심경청 프로젝트 대국민 보고’ 직후 기자들과 만나 “대선기획단이 출범하면 구체적으로 정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개입 원칙론을 고수했던 그간의 입장과는 그 결을 달리하는 발언이었다.
당 안팎에선 ‘반이재명 연합군’의 압박이 들어맞았다는 분석이 나왔다. 1강 체제를 형성한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뺀 나머지 대권 후보들은 대선 경선 연기를 직간접으로 압박했다. 빅 3의 두 축인 이낙연 전 대표와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지도부 결단을 촉구하는 우회 압박 전술을 구사했다. 후발 주자인 이광재·김두관·박용진 의원과 최문순 강원도지사 등은 "대선 경선을 연기하자"며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다.
특히 여의도에선 원조 친노인 이광재 의원 행보를 주목했다. 이 의원은 친문계의 제3후보론 주자 중 한 명이다. 그는 5월 30일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백신 문제가 해결됐을 때 경선을 시작하는 것이 국민들에 대한 예의”라며 코로나19 방역 책임론을 재차 앞세웠다. 집단 면역이 가시화되는 오는 11월까지 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을 미루자는 취지다.
공교롭게도 민주당은 같은 날 ‘대선용 돈 풀기’를 사실상 가동했다. 하반기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을 위한 ‘2차 슈퍼 추경(추가경정예산)’의 당위성을 본격적으로 띄웠다. 이로부터 불과 2∼3일 만에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의 타임 스케줄(7월 지급)과 프레임(여름 휴가비)이 완성됐다. 전 국민 긴급재난지원금(14조 원)과 자영업자 손실보상(6조 원), 백신 유급 휴가비(최대 9조 원) 등을 합하면, 여당이 대선 정국에서 풀 재정은 총 30조 원에 육박한다.
그러나 제3 후보론을 띄우는 친문계의 대선 플랜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범주류 한 인사조차 “최소 삼박자가 맞아야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여권의 복수 관계자들이 꼽은 대선 경선 연기론의 변수는 △이재명 경기도지사 의중 △당 지도부의 구체적 액션 플랜 △정치적 명분과 국민 여론 획득이다. 이 지사는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민주당 지도부도 여지만 남겼을 뿐 실행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정치적 명분이나 국민 여론도 오롯이 확보했다고 보기 어렵다.
더구나 친문 직계는 판 흔들기의 1차 분기점이었던 민주당 5·2 전당대회에서 당권 장악에 실패했다. 친문 핵심들이 합류한 부엉이모임 좌장 격인 홍영표 의원(35.01%)은 송영길 대표(35.60%)에게 0.59%포인트(p) 차로 석패했다. 비문(비문재인) 한 관계자는 “(친문계가) 당권을 차지하지도 못했는데, 룰 변경을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했다. 친문계의 분화도 민주당 대선 경선 룰 변경 가능성을 낮추고 있다. 룰 변경의 현실 가능성만 따지면 친문계가 드라이브를 거는 대선 경선 연기론은 ‘공갈포’에 가깝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 경우 민주당 대선 경선은 ‘2007년 정동영(DY) 모델’로 끝날 가능성도 크다. 당시 친노계는 이해찬 전 대표와 유시민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이 출마했다. 유 이사장은 첫 순회 경선 지역이었던 제주·울산에서 최하위(4위)를 차지한 뒤 사퇴했다. 이 전 대표는 완주했지만, DY(정동영)·손학규에게 패했다. 당시 최종 승자는 열린우리당을 깨고 대통합민주신당을 만든 DY였다. 당시 이 지사는 정동영 캠프에서 비서실 수석부실장을 맡았다. DY 캠프 조직인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들’ 공동대표도 역임했다.
현재의 친문 분화와 마찬가지로, 당시 친노계 조직력도 급속히 와해됐었다. 친문계가 룰 변경을 통한 판 흔들기를 주도하지 못하면, 비주류에게 또다시 대선 후보 자리를 뺏길 수도 있다는 얘기다. 제17대 대선에서 정동영 후보(26.1%)는 이명박(MB) 전 대통령(48.7%)에게 22.6%p 차로 대패했다. 1강 체제를 만든 이 지사가 문재인 대통령과 차별화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민주당 한 초선 의원은 “이 지사가 친문계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껴안을 것”이라며 “물밑 작업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