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 태아까지…잔인한 그놈 누구?
▲ 지난 2월 18일 만삭 의사부인 사망 사건의 피의자 백 씨(31ㆍ종합병원 레지던트) 변호를 맡은 임태완 변호사가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남편 백 씨는 24일 경찰에 구속됐다. 연합뉴스 |
박 씨의 사망이 부부싸움 후 백 씨가 집을 나간 후 일어난 사고사였는지 남편의 우발적 살해였는지 여부는 이제 법정에서 풀어야 할 숙제로 남은 셈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백할 만도 한데….”
‘만삭 의사부인 사망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마포경찰서 관계자는 2월 23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각종 증거가 현장에서 수집됐음에도 피의자가 완강히 모든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에 대해 혀를 내둘렀다. 실제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받고 있는 백 씨는 “경찰이 범인을 나로 특정 지은 채 수사를 한쪽 방향으로만 몰아가고 있다”며 경찰수사에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1월 14일 사건 발생 직후 경찰수사를 통해 ‘부부의 트레이닝복에 묻은 혈흔, 안방 이불에서 발견된 핏자국, 깨져 있는 스탠드 전구, 박 씨 시신 곳곳에 남은 멍과 흉터, 손톱 밑에 남은 남편의 DNA, 중력의 반대 방향으로 흐른 눈동자의 핏자국’ 등 경찰이 공식적으로 밝힌 것만도 수십 건의 증거가 현장에서 확보된 상태다.
그럼에도 백 씨는 자신의 무죄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백 씨 측의 주장은 이러하다. 그는 일주일 뒤 있을 전문의 자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새벽(6시 14분)부터 도서관을 찾았다.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하다보니 가방 안에 있던 휴대폰에서 전화가 울리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더욱이 휴대폰은 그의 머플러에 감겨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박 씨의 부모님들이 백 씨의 휴대폰으로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저녁 때쯤에야 공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백 씨는 거실이나 안방에 있어야 할 아내가 보이지 않는 걸 알았다. 잠깐 외출을 나갔으려니 생각하고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후 욕실문을 열었다. 순간 백 씨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욕실 안 욕조에는 아내 박 씨가 옷을 입은 채 빈 욕조에 몸을 반쯤 걸친 상태로 숨져 있었던 것이다.
아내의 맥박이 뛰지 않는 것을 알고 당황한 백 씨는 급히 관할 경찰서에 아내의 사망을 알렸고, 경찰은 현장에 출동했다. 경찰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백 씨는 “아내가 임신 때문에 몸매가 망가질 것을 우려해 다이어트를 했다”며 “아마 욕실에 들어갔다가 극심한 현기증을 느껴 욕조에 걸터앉았다가 미끄러져 머리를 박고 사망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찰이 바라본 현장은 백 씨의 설명과는 전혀 달랐다. 욕실에 들어가 박 씨의 시신을 본 경찰은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남편의 설명대로 만삭의 여성이 갑자기 머리를 박아 사망했다면 욕조에 누운 자세가 불안정해야 했지만 박 씨의 시신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타살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경찰은 시신의 머리 정수리 부위에 1.5㎝가량 찢긴 상처 등 모두 6개의 상처와 얼굴과 손목 등 곳곳에 외부에서 가한 힘으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멍을 발견했다.
백 씨는 사망 추정 시각에 ‘도서관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남편의 주장대로 머리를 부딪쳐 사망한 것이라면 욕조나 욕실 어딘가에 혈흔이 발견돼야 했지만 당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은 것도 의문이었다. 백 씨는 출산이 임박한 임신부였기에 머리를 부딪치지 않았더라도 목이 눌려 질식사할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항변했다.
결국 수사의 향방은 부검 결과에 따라 달라지게 됐다. 2월 1일 국과수에서는 ‘박 씨의 사인이 강한 목 압박에 따른 질식사로 보인다’는 것과 ‘박 씨 손톱 아래에서 백 씨의 DNA가 검출됐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남편이 아내를 목 졸라 살해한 후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욕실로 옮겼을 것이라고 추정한 경찰은 다음날 남편을 긴급 체포했고, 국과수에서 보내온 증거물을 근거로 그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러나 법원은 백 씨의 손을 들어줬다. 무엇보다 사망 시각을 정확히 특정하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됐다. 사망 시각의 경우 사체의 부패 정도를 토대로 추산하게 돼 있는데 당시 사고 현장은 난방이 계속 가동된 탓에 실내 온도가 높은 편이었다. 이 때문에 사망 시각은 1월 13일 오후 5시 45분부터 다음 날 오전 6시 47분 사이까지 광범위한 시간대로 추정됐다. 12시간가량의 시간 동안에 사망까지 이르게 된 결정적 이유가 백 씨의 주장대로 사고사인지 아니면 경찰 측이 주장하는 타살인지를 단정 짓기 어렵다는 것이 법원 측의 판단이었다.
사망 시각 이외에도 백 씨가 영장실질심사에서 국과수의 소견에 대해 의학적 지식을 동원해 나름의 알리바이를 댄 것도 영향을 끼쳤다. 손톱에 남은 백 씨의 DNA에 대해서 그는 변호사를 통해 “평소 아토피 때문에 아내가 자주 긁어줬기 때문에 손톱에 유전자가 발견된 것뿐이다”고 응답했다.
첫 번째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경찰은 살해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주변 탐문 취재를 벌였다. 경찰은 2월 10일 백 씨의 오피스텔을 다시 정밀 검증했고, 이 과정에서 안방 침대와 이불 등에서 혈흔을 새로 확보했다. 또 안방에서 부서진 스탠드 전등의 일부분을 발견했다. 경찰 측은 이를 안방에서 다툰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판단해 감식을 맡겨둔 상태다.
그러나 백 씨 측은 가정에서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핏자국이 아니겠냐고 항변하고 있다. 이불에 묻은 지름 1~1.5㎝ 정도의 혈흔은 일반인들이 코피를 흘려 이불에 스친 정도에 불과하고,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흔적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또 트레이닝복에서 발견된 부부의 혈흔에 대해 “사건 전날 백 씨가 부인에게 머리 뒤에 난 뾰루지를 짜달라고 했는데 그때 피가 튄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과 백 씨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찰나 2월 22일 국과수의 2차 소견 결과가 나왔다. 국과수는 ‘눈에서 흐른 피의 방향으로 봤을 때 욕실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다른 자세로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는 감식 결과를 밝혔다. 담당 형사는 “오른쪽 눈에서 흐른 피가 눈두덩 아래쪽을 타고 눈초리 쪽으로 중력을 거슬러 흘러내린 자국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 목 근육이 손상된 정도를 봤을 때 누군가 손으로 강하게 눌렀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학적 근거도 추가됐다.
사망 시각 역시 범위가 좁혀졌다. 사건 발생 당일 오전 3시~6시 41분으로 압축된 것이다. 경찰은 2월 22일 오전 다시 백 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재청구했다. 그 결과 법원은 사고사가 아닌 타살이라는 점을 인정해 유력한 용의자인 남편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사건의 진상이 사고사가 아닌 타살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범인이 남편이란 증거는 경찰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아내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갈등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도 양측 부모님들의 주장이 엇갈려 분명치 않은 상황이다.
사망한 박 씨의 부모님은 평소 두 사람이 컴퓨터 게임에 빠진 백 씨 때문에 잦은 갈등을 빚었다고 진술했다. 또 “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당일 사위로부터 전화가 와 평소 부부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잘 안 꺼내는데 새삼스럽게 ‘갈등이 있었는데 원만하게 잘 해결됐다’고 먼저 설명했다”며 “범죄를 덮기 위한 행위였던 셈이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백 씨의 부모님은 “사소한 말다툼을 가지고 박 씨 쪽에서 확대 해석을 한다”며 “티격태격했어도 부부관계는 원만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마포경찰서 형사과장은 2월 25일 언론 브리핑을 통해 “백 씨가 게임중독 증상을 앓고 있었는지 여부를 프로파일러 수사기법을 통해 밝히고, 온라인 게임이 살인충동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하는 등 구체적인 범행동기를 밝힐 예정이다”고 말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