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막힌 노림수와 파격…과연 ‘쎈돌’
그나저나 이세돌 9단도 며칠 전에 일을 당할 뻔했다. 요즘 진행되고 있는 제3회 BC카드배 32강전에서 중국의 복병, 아직 신상명세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쑨리 4단에게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던 것. 쑨리 4단은 약관의 신예인데, 요새는 정말 누가 누구인지, 누가 강하고 누가 약한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누구나 한칼이 있고, 누구든 걸리면 명성이고 랭킹이고 역대 전적이고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보내 버리니까 말이다.
<장면도>가 이세돌 9단과 쑨리 4단의 실전보. 이 9단이 흑이다. 바둑은 종반 무렵에 와 있는 모습. 이 시점에서 검토실의 중론은 흑이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좌하 일대 흑들의 대마가 아직 완생이 아닌 데다가 우상 방면에는 백A로 붙이는 수단이 남아 있다는 것.
이 9단이 흑1로 내려섰다. 응수타진이었으리라. 대마를 살리기 전에, 끝내기를 겸해 백이 어떻게 받을 것인지 한번 물어 본 것. 그러나 이게 단순한 응수타진이 아니었다. 단순한 끝내기는 더욱 아니었다. 노림수였다. 필살의 반격을 숨긴 노림수였다. 아하~ 우리 아마추어 눈에는 그저 무심한 한 수처럼 보일 뿐이건만!
<1도> 백1로 막은 수. 당연한 수. 손 빼면 흑이 한 칸 뛰어 들어올 텐데, 그건 무지 큰 수 아닌가. 그러나 이게 이세돌 9단의 노림을 눈치 채지 못한 응수, 순진한 패착이 되고 말았다. 이세돌 9단의 흉중을 짐작하기에는, 아직은 좀 어린 나이인 것일까. 흑2로 건너붙인 수. 이게 역전타였다. 백3과 흑4로 피차 끊고 끊긴 다음 ?
<2도> 백1부터 흑8까지는 일사천리. 여기에 이르면 우리에게도 보이기 시작한다. 아하, 흑가 있으면 흑2, 4, 6, 8의 돌들이 뭔가 이쪽으로 연결하는 수가 생길 수가 있구나!
<3도>는 가상도다. 백1로 막고 3으로 이으면 어떻게 될까? 아닌 게 아니라 흑4로 그 돌들은 연결해 가겠지만, 백5로 여기를 이으면 이쪽 흑 대마가 잡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보인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흑은 4로 연결하는 것에 급급해하지 않고 달리 대응하는 수가 있었던 것이다.
<4도> 흑1로 잡으며 이쪽 대마를 살린다. 그런가? 백2면 어떻게 되는가. 이쪽 흑돌들은 도로 떨어지지 않는가.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흑3으로 몬 다음 5로 먹여치는 수가 있는 것. 백6으로 따내는 순간, 오른쪽 흑 다섯 점이 단수가 되지만, 흑7로 잇는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게 일거에 해결이 되어 버린다. 백은 5 자리에 이을 수가 없다. 진즉에 잡혀 있던 흑이 정말로 요긴한 자리에 있는 것이다.
<5도>는 <2도> 다음의 실전진행. 백이 1로 잡는 정도일 때 흑은 2로 위 아래를 연결했다. 연결이 대수는 아니다. 백 석 점을 통식하면서 연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상귀 백7부터 흑13까지는 예정된 수순. 그러나 흑은 선수를 잡아 좌상귀 14에 선착하는 것으로 승리의 깃발을 꼽았다. 백7 때 <6도> 흑1쪽에서 받는 것은 무리. 백2, 4로 간단히 살아 버린다. 어쨌거나 백은 <장면도> 흑1 때 다른 수는 없었을까.
<7도> 흑1 때 잠시 호흡을 고르면서 뜸을 들여야 했다. 백2를 선수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흑이 4 자리에 두어 백 한 점을 따내면 그때는 <1도> 백1로 막아도 된다. <1도> 흑2로 건너붙이는 수가 아무 약발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럴 경우 좌하 흑 대마는 다시 삶을 찾아 나서야 한다.
<7도> 백2 때 흑이 그쪽을 받지 않고 흑3으로 뛰어 들어가면? 백4로 살린다. 이 돌이 살아오면 이번에는 이쪽 흑 대마가 5~11로 살아야 한다. 사는 와중에 백10이 놓이니 이쪽 흑 대마도 다시 15까지 살아야 한다. 대마가 잡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위아래가 모두 쌈지뜨고 산 모습. 이런 다음 백이 우상귀로 손을 돌리면 이건 물론 백의 낙승이었다는 것. 실전과는 도대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세돌의 바둑, 그 노림과 수읽기와 파격은 늘 우리를 즐겁게 한다. 이창호 9단이 숨을 고르고 있고 라이벌이었던 구리 9단과 콩지에 9단이 스스로 무너지고 있는 지금, 이세돌 9단에게 올해는 천하를 평정할 기회로 보인다. 이제는 오히려 한국의 박정환 9단, 중국의 박문요 9단, 승단의 계단을 밟아 올라온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9단에 오른, 박 씨 성을 가진 두 청년이 경계 대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정환과 박문요에게도 올해는 기회다. 최철한 9단, 박영훈 9단, 원성진 9단은 어떨까. 아니 김지석 7단, 허영호 8단, 이들은 또 어떨까.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