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25일 집앞에서 퇴임 축하행사를 하고 있는 김대 중 전 대통령 내외. 주변에서 지켜본 한 인사는 이희호 여사가 DJ 연설원고의 ‘최종데스크’였다면서 우스개로 이 여사가 진짜 실세라고 했다. | ||
그래서 DJ가 어떤 스타일을 선호했는지를 가지고 용인술의 특징을 잡아내려면 가닥이 잡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의 능력과 스타일에 맞춰 서로 다른 임무를 맡겼다.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게 DJ의 능력이었다. 엘리트형과 재사형은 주로 정부부처 또는 청와대에, 가신형은 당쪽에 주로 기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DJ가 선호했던 인사들은 대부분 세 가지 미덕을 갖고 있었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번뜩이는 아이디어, 부지런함, 뚜렷한 자기소신 등이 그것이다. 이는 바로 DJ 자신이 갖고 있던 특성이기도 하다. 측근 그룹인 동교동계 인사들은 “DJ는 게으른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집권 초기에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에 발탁돼 신주류 핵심으로 부상했던 장성민 전 의원은 DJ와 ‘닮은 꼴’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민주당 한화갑 의원이 발성법이나 손짓이 DJ와 비슷해 ‘리틀 DJ’라는 별명을 갖고 있지만 성격은 장 전 의원이 가장 DJ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 단초는 DJ가 제공했다. 당시 장 전 의원이 상황실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권력 주변에서 말들이 많았다. 당연히 장 전 의원을 견제하고 비판하는 보고가 DJ에게 올라갔다.
장 전 의원이 한 언론사 사주와 술자리를 갖다가 대판 싸웠다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장 전 의원에 대한 DJ의 신임은 여전했다. 대신 DJ는 이렇게 장 전 의원을 옹호했다는 후문이다.
“장성민은 잘 쓰면 약이고 못 쓰면 독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젊은 시절의 나를 닮았다.” 쉴새없이 쏟아지는 아이디어와 왕성한 활동력 등과 같은 장 전 의원의 장점을 높이 평가했던 셈이다.
청와대 수석과 문화부 장관을 지낸 김한길 전 의원도 장 전 의원과는 스타일이 다르지만 풍부한 아이디어로 DJ의 눈에 들었다는 게 정설이다. ‘국민의 정부’ 동안 김 전 의원처럼 DJ가 줄기차게 배려해줬던 인물은 드물다.
김 전 의원도 사석에서 “내 인생은 세 명의 어른이 키워준 셈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강원룡 목사,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 김한길 전 의원 | ||
“나는 김 대통령을 만나면 지금도 떨린다. 김한길 같은 사람이 대통령에게 거리낌없이 말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부럽다.”
정권 초기에 법무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에 각각 기용됐던 박상천, 이해찬 의원은 엘리트형으로 분류된다. DJ를 어려워하지 않았다는 점은 장 전 의원 등과 비슷하다. 박 의원의 경우 법무장관 시절 DJ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 사면복권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을 때 반대의견을 고수, 관철시켰다.
박 의원은 “대통령이 한보사건 여파로 구속된 현철씨 사면을 강력하게 지시했다. 그러나 끝까지 안 된다고 말했다. 형이 확정되지 않은 현철씨는 사면 대상이 아니었는데 대통령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었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박 의원은 야당 시절에도 DJ에게 ‘대드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정도로 꼼꼼하게 지시하는 DJ에게 “총재님, 그게 아닙니다”라고 반박했던 게 박 의원이었다. 박 의원은 심지어는 모임이 끝나고 나가는 DJ를 붙잡고 자신의 주장을 설득하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DJ가 무작정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을 평가했던 것은 아니다. ‘급수’를 따졌다고 보인다. 되지도 않는 논리로 밀어붙이면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구 여권 출신으로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과 당대표까지 지낸 김중권씨는 이 같은 DJ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DJ의 신임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무리수를 두지 않았다.
한 동교동계 인사는 “김중권씨는 자기 뜻을 정면으로 관철시킨 적이 없다. DJ의 생각을 읽어내고 그에 따라 대응했다. 예컨대 비서실장 시절 자기사람을 심을 때면 3순위로 보고했다. 대신에 1, 2순위에는 결격이 있거나 호남 출신인 인사를 내세웠다. 당연히 DJ는 3순위를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DJ는 자기가 보는 상대방의 성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지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상천, 이해찬 의원 등의 경우 장관 재임시 DJ가 많은 재량권을 줬다고 주장한다.
반면 어떤 인사들은 “DJ가 선생님이라는 별명처럼 사소한 일까지 지시했다”고 전한다. L의원은 원내총무 시절 사석에서 “DJ는 정말 대단하다. 어제 밤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원내 상황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설명하면서 전략을 지시했다. 또 내가 세운 사소한 원내전략까지 지적하면서 ‘잘했다’고 칭찬해줬다”고 말했다.
DJ정권 하에서도 직책이 권력의 크기를 결정하지 않았다. DJ와의 비공식적 인간관계의 깊이가 권력의 크기를 좌우했다. “DJ와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권력은 커졌다”는 게 통설이다.
특히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 한화갑 전 대표, 남궁진 전 문화부 장관, 김옥두 전 사무총장 등과 같은 가신형의 경우는 이 같은 ‘거리 반비례’의 법칙을 정확하게 적용받았다. 민주당 권노갑 전 고문이 직책 없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고 DJ와 ‘형님 동생’으로 지냈던 것은 단적인 사례다.
권 전 고문은 제대로 된 당직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현역의원도 아니었지만 정부산하단체장 인사권, 2000년 16대 총선 공천권 등을 사실상 독점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민주당 중진 K 전 의원이 16대 총선에서 DJ가 찍은 ‘물갈이’대상으로 낙천됐다가 공천을 받게 되는 과정에도 권 전 고문이 지대한 역할을 했다.
K 전 의원은 DJ를 독대하기 위해 집요하게 권 전 고문에게 매달렸다. 결국 K 전 의원은 권 전 고문의 주선으로 DJ를 면담, 모종의 ‘벼랑끝 전략’을 펴서 공천을 따내게 된다.
반면 권 전 고문의 정치적 경쟁자였던 한화갑 의원은 당대표까지 지냈지만 실권은 적었다. 한 의원은 대표시절 “내가 무슨 대표냐. 대표는커녕 소표도 안 된다”고 자조하곤 했다.
한 의원이 ‘소외감’을 토로했던 데 비해 대부분 가신형 총아들은 “우리가 DJ 덕분에 출세했다”는 인식을 숨기지 않았다. 김옥두 총장의 경우 종종 “내 수준에 집권당 총장직이 과분한 것인 줄 나도 잘 안다”고 말하면서 DJ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한 의원이 DJ를 어려워했던 데 비해 권 전 고문은 DJ 앞에서 ‘자유인’이었다. 정권 후반기에 청와대 수석을 지낸 S씨는 DJ에게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가 희한한 광경을 목격했다.
DJ가 권 전 고문의 전화를 받고 “자네 지금 (청와대로) 들어오게”라고 말했다. 권 전 고문이 안 된다고 했는지 DJ는 다시 “그러면 약속 마치고 저녁에 들어오면 안되겠나”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수화기 너머의 권 전 고문은 끝까지 버텼고 결국 DJ는 “정 안되겠으면 자네가 나중에 시간이 날 때 들어오게”라면서 수화기를 내렸다.
‘소통령’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도 권 전 고문 못지 않았다. DJ가 가장 많은 재량권을 허용했던 케이스다.
▲ 2000년 총선 당시 권노갑 고문(오른쪽)에 의해 제외된 장성민 전 의원(왼쪽)은 이희호 여사의 힘을 빌어 공천을 따냈다고 소문이 났었다. | ||
DJ가 연예인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걸어 들어왔고 그 뒤에 박 대변인이 따라왔다. 그런데 DJ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 대변인이 큰소리로 연예인들 이름을 부르면서 인사를 건넸다. 가벼운 농담까지 했다. DJ는 불쾌하게 느끼기는커녕 박 대변인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미소를 머금었다는 게 한 참석자의 전언이다.
박지원씨는 사실 DJ가 선호했던 세 가지 미덕을 가장 골고루 갖췄던 인물로 꼽힌다. 만취가 돼서 귀가해도 새벽별을 보고 집에서 나오는 부지런함을 갖춘 데다 중요한 국면마다 자기 주장을 담은 전략과 아이디어를 주장할 줄 아는 특급 보좌관이었다. 때문에 DJ가 박씨에게 권 전 고문에 버금가는 ‘행동의 자유’를 허용한 게 이상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DJ가 정말 존중했던 동지는 부인 이희호 여사였다는 게 동교동계 인사들의 얘기다. 목포상고 출신인 DJ로서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사회운동가였던 이 여사에 대한 동지적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DJ가 결정한 사안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이 여사라는 소문이 적지 않았다. 이와 관련, 장성민 전 의원이 2000년 4월 총선 공천을 받는 과정은 흥미롭다.
민주당 구주류의 수장인 권 전 고문은 정치일선으로 복귀, 공천권을 행사하면서 신주류 핵심이었던 장 전 의원을 공천명단에서 지워버렸던 것으로 알려진다.
자신이 정권 초기 일본에 체류하면서 귀국을 시도할 때마다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이었던 장 전 의원이 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과 협력해 자신의 귀국을 막았다는 게 권 전 고문의 불만이었다.
민주당 공천자 명단이 발표되는 당일 오전 당무회의자료에도 장 전 의원의 이름은 빠진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김옥두 사무총장이 황급하게 장 전 의원의 이름을 끼워 넣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낙천 사실을 확인한 장 전 의원이 밤부터 새벽까지 뛰어 ‘반전’에 성공한 것이다. 민주당 주변에서는 장 전 의원이 이희호 여사 쪽에 읍소한 끝에 공천을 따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동교동계 핵심인 한 인사는 청와대 수석 재임시 사석에서 ‘우스갯소리’라며 DJ와 이 여사에 대한 일화를 털어놨다.
“야당 시절 내가 맡았던 일은 총무비서역할이었다. 공보비서는 주로 기자 출신이 담당했다. 그런데 어느 날 총재님(DJ)이 나를 동교동 서재로 부르더니 ‘앞으로 공보비서를 하라’고 지시했다.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나는 기자시험을 봐서 떨어졌었다. ‘존경하는’ 기자 출신들이 작성하는 총재님 연설원고 등을 감히 내가 어떻게 쓸지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기우에 불과했다. 다음날 총재님이 나에게 연설문을 부를 테니 받아 적으라고 했다. 공보비서는 부르는 대로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었다. 열심히 받아 적어서 원고를 드리니 찬찬히 읽어보면서 상당히 많이 수정해서 넘겨주면서 ‘다시 정서하라’고 지시했다.
정서하고 나니 ‘잠깐 기다리라’면서 그 원고를 들고 나갔다. DJ는 돌아와서 군데군데 수정된 원고를 건네주면서 다시 쓰라고 지시했다. 이희호 여사가 최종 데스크를 본 원고였다. 그때 나는 ‘아 정말 실세는 이 여사구나’라고 느꼈다.”
DJ가 여성인재의 중용을 강조했던 것도 특징이다. 비록 정권 후반기였지만 40대 초반의 박선숙씨를 청와대 대변인으로 발탁할 정도였다. 당료 출신인 박 전 대변인은 꼼꼼하고 조직적 사고력을 갖춘 여성이었다. 박지원 실장이 강력 천거했다는 설도 있지만 박 전 대변인 본인이 복잡한 정국 상황을 파악하면서 DJ의 뜻을 읽을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그러나 DJ는 공교롭게도 여성 장관의 경우 대부분 ‘미모의 여성’을 선택했다. 신낙균 문화부 장관, 김명자 환경부 장관 등은 중년을 넘긴 나이였지만 한결같이 앳된 외모의 소유자였다. 신 전 장관은 장관을 그만둔 뒤에도 민주당 지명직 최고위원을 지낼 정도로 DJ가 배려했다. 김명자 장관은 국민의 정부 최장수 장관이었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