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팀들과 대등한 경기로 박수받아…“내가 뭇매 맞겠다 각오로 감독직 지원, 모든 에너지 쏟아부었다”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도쿄올림픽 조별리그를 3패로 마무리했지만 국민들은 세계적인 강팀들을 상대로 대등한 경기력을 선보인 선수들에게 ‘졌지만 잘 싸웠다’고 박수를 보냈다.
올림픽 전까지만 해도 여자농구 대표팀은 전혀 관심을 받지 못했다. 13년 만의 올림픽 무대 진출인 데다 국제 경쟁력이 떨어지고, 조별리그에서 상위 랭킹에 올라 있는 강팀들을 연속으로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선수들이 경기 결과가 아닌 내용면에서 기대 이상의 결과를 냈다. 그 배경에는 전주원 감독이 존재한다. 9일 소속팀 우리은행으로 복귀한 전주원 코치를 만나 대표팀을 이끈 감독 전주원의 올림픽 이야기를 들었다.
전 감독이 대표팀을 맡기까지엔 우여곡절이 있었다. 여자농구 대표팀이 2020년 올림픽 최종예선에서 1승 2패로 본선 티켓을 획득했는데 당시 대표팀을 이끌던 이문규 감독이 영국전 승리 후 “선수들 정신력이 나태해 역전을 허용할 뻔했다”는 인터뷰로 혹사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이 전 감독은 올림픽 본선행에 성공하고도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대한농구협회는 여자대표팀 감독직 공모를 시작했다.
전주원 감독이 대표팀 감독직에 응모한 것은 2020년 3월. 도쿄올림픽이 코로나19로 인해 1년 연기되면서 최종적으로 감독에 선임된 것은 올해 1월 말,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대표팀이 소집된 것이 지난 5월이었다. 전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것은 6개월이지만 실질적으로 팀을 지휘한 것은 3개월도 되지 않았다.
―정말 고생 많았다.
“나보단 선수들이 더 고생했다. 이렇게 되니까 8강 진출에 실패한 거랑, 4점차로 패한 스페인전에서 1승이라도 올릴걸 하는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스페인전에서 승리했다면 선수들이 이후 경기들을 조금은 마음 편히 풀어나갔을 것이다.”
―대부분 국민들이 3패한 여자농구 대표팀을 향해 박수를 보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처음에는 세계 랭킹 3위인 스페인을 상대로 큰 점수 차로 패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등한 경기를 펼치다 패한 걸 보고 격려를 보내주신 건데 40점 차 패배든, 4점 차 패배든 결국은 패한 건 마찬가지다.”
―대한농구협회에서 여자농구 대표팀 감독을 공모했을 때 어떤 연유로 응한 건가.
“주위에서 다들 ‘이번엔 전주원이 해줘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라. 대표팀의 뒤숭숭한 분위기를 잡으려면 WKBL 출신 지도자가 나서야 한다고 해서 위성우 감독님의 조언과 선배들한테 자문을 구한 끝에 공모에 나섰다. 누군가 이 상황에서 뭇매를 맞아야 한다면 내가 맞겠다는 생각이었다.”
―대표팀 선수들이 모두 모여 훈련할 수 있는 여건이 좋지 않았다. 특히 WNBA에서 활약 중인 박지수의 합류가 많이 늦은 편이었는데.
“지수가 뒤늦게 합류한 건 WNBA 룰이니까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다른 11명의 선수들은 시즌 마치고 모인 건데 다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시즌 치르며 크고 작은 부상들을 안고 뛴 선수가 대부분이었다. 선수들 몸 상태를 확인하고 나선 솔직히 절망적이었다. 큰 대회를 앞두고 제대로 손발을 맞춰 볼 시간조차 부족했다. 선수들이 온전한 몸 상태로 훈련을 시작한 건 도쿄로 떠나기 전 한 달 남짓이었다. 그래서 그 시간 동안 굉장히 집중해서 훈련을 이어갔다. 박지수가 귀국 후 14일간 자가격리를 마친 다음 합류했는데 11명의 선수들이 박지수 합류를 염두에 두고 철저히 준비했다. 지수가 바로 적응할 수 있도록 선수들이 많은 도움을 줬다.”
전주원 감독은 상대팀 경기 영상을 수차례 반복해서 돌려보며 그들이 잘하는 부분을 막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다고 말한다. 신장과 체력의 열세를 딛고 좋은 모습을 보이려면 상대의 장점을 무력화시키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탄탄한 조직력과 스피드를 가미한 공격력을 장착하는 과정에서 전 감독은 선수들과 절묘한 호흡을 이뤄냈다.
―혹시 이전부터 대표팀 감독이란 자리를 목표로 삼은 적이 있었나.
“어렸을 때는 후배들이 내게 대표팀 감독을 해봐야 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건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말했다. 여전히 나란 사람은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했다. 이번 대표팀을 맡을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요인들 중 위성우 감독님이 도와주겠다고 말씀해주셨던 게 큰 힘이 됐다. 감독님은 이미 네 차례나 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나도 그 밑에서 코치를 했기 때문에 그 경험과 조언을 잘 살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사실 도쿄올림픽이 개막되기 전까지만 해도 과연 올림픽이 열리긴 열릴까 싶었다. 선수들한테도 그런 불안감이 존재했을 것 같다.
“일본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간대? 가긴 가?’라는 것이었다. 선수들한테 무조건 일본은 갈 테니까 다른 생각하지 말고 훈련에 집중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른 대표팀들과 달리 연습 경기 횟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협회에서 해외 전지훈련이나 일본에 일찍 들어가 다른 조 팀들과 연습 경기를 추진했지만 내가 반대했다. 만약 (박)지수가 일찍 대표팀에 합류했다면 협회의 방향대로 따라갔을 텐데 우리한테는 연습 경기보다 지수와 다른 선수들이 호흡을 맞출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리고 내 경험상 먼저 들어가서 연습 경기한 대회치고 성적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우린 일본과 시차도 없었고, 다른 팀들한테 보여줄 만한 전력도 안 된 터라 진천선수촌에서 더 집중해 훈련을 하는 게 올바른 선택이라고 믿었다. 연습 경기를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못한 거다.”
―뒤늦게 박지수가 합류했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나.
“지수도 소속팀인 KB 체육관에서 개인 훈련을 했지만 발목 부상으로 코트 훈련을 거의 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오죽하면 내가 우스갯소리로 ‘지수야, 너 일반인이지?’라고 말했겠나. 갑자기 훈련량이 늘어나면 2차 부상의 우려가 있어 6일 정도 같이 연습하면서 서서히 몸을 끌어 올리는 데 집중했다.“
―올림픽 조별리그 1차전 상대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전 앞두고 선수들에게 어떤 내용을 주문했는지 궁금하다.
“스페인은 속공이 굉장히 빠르고 센터가 장신이다. 그들의 속공만 막는다면 의외로 경기를 잘 풀어갈 수 있다고 봤다. 우리가 턴 오버에 의한 속공 빼고 웬만한 리바운드 후 속공은 거의 안 내줬다. 선수들이 그만큼 집중해서 상대의 속공을 막는 데 최선을 다했다.”
―4점차 승부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는 스코어였다.
“3쿼터 초반까지 대등하게 시소게임을 벌이다 4쿼터 2분 30초 남겨 놓고 박지수가 무릎 타박상으로 빠지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선수들은 스코어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끝나고 보니 4점차 패배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을 것이다.”
―53-74, 19점 차로 패한 캐나다전은 3쿼터까진 해볼 만한 상황이었다.
“조별리그에서 맞붙는 3팀 중 캐나다는 1승을 거둘 수 있는 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선수들에게 여러 가지를 주문했는데 내가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선수들이 더 힘들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의견이지만 심판 콜도 도움이 안됐다. 캐나다 선수들이 어떤 파울을 해도 휘슬이 안 불리니 우리 선수들이 당황했을 정도다. 4쿼터 7분 남았을 때 6점 차로 따라 붙었는데 결국 스코어를 뒤집지 못했다. 이 또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제일 아쉬웠던 경기로 세르비아전을 꼽았다.
“7분 10초까지 우린 3득점이 고작이었다. 찬스가 많았지만 슛이 진짜 안 들어가더라. 그럴 때 선수들에게 뭐라고 하면 더 부담이 되는 터라 무조건 자신 있게 슛을 쏘라고 말했다. 10개 쏴서 10개 안 들어가도 되니 무조건 자신 있게 경기해달라고 주문했다.”
전주원 감독은 스포츠는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패하더라도 어떻게 패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1승하고 8강에 진출했더라면 선수들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겠지만 세계적인 팀들과 엇비슷한 경기력을 보인 경험들을 잊지 말고 잘 다듬어가길 바란다는 진심도 덧붙였다.
―일본 여자대표팀이 농구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 부분이 전 감독에게 어떤 메시지를 줬는지 궁금하다.
“일본은 5, 6년 전부터 일본을 잘 아는 외국인 감독에게 대표팀을 맡겼고, 다양한 국제대회와 해외 전지훈련을 통해 유럽 팀들과 격차를 서서히 좁혀 나갔다. 그 결과가 이번 올림픽에서 나온 것 같다. 솔직히 우리랑 일본의 환경은 비교 대상이 안 된다. 단순히 프로 농구만 비교하는 게 아니라 농구를 좋아하는 어린아이들부터 학원 스포츠, 그리고 프로팀까지 비교할 수 없는 인프라를 구축해 놓았다. 굉장히 부러운 환경이다.”
―올림픽 이후 여자농구 대표팀은 다시 전임감독 공모를 한다. 계속 대표팀을 맡을 생각이 없는 건가.
“이번 올림픽 대표팀을 이끌면서 시작할 때부터 도쿄올림픽이 마지막이라고 못 박았다. 나는 소속팀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고, 올림픽에서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었기 때문에 더 이상 대표팀을 이끌 여력이 없다. 3개월가량 ‘팀 코리아’를 외치며 코칭스태프와 동고동락해준 12명의 태극전사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감독 전주원이 아닌 우리은행 전주원 코치로 돌아간 그에게 “프로팀 감독에 도전할 의향이 없느냐”라고 물었다. 전 코치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나중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이전에도, 또 최근에도 전 코치에게 프로팀 감독 제안이 있었지만 전 코치는 모든 제안들을 정중히 거절했다고 말한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