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움직이는데 현정은이 ‘쫑긋’
▲ 최근 현대중공업이 하이닉스 인수에 검토 의지를 내비치면서 범 현대가를 뒤흔들 또 다른 변수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은 서울 대치동 하이닉스 반도체 사무소.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지난 수년간 하이닉스 채권단은 여러 기업에 인수 제안서를 보내면서 의사를 타진해 왔지만 하이닉스 새 주인 찾기 작업은 번번이 난항에 부딪쳐 왔다. 하이닉스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는 있지만 지속적 투자를 필요로 하는 반도체 사업 특성상 ‘대재벌’쯤 돼야 인수 가능한 회사로 여겨진 까닭에서다.
현금성 자산이 많은 현대중공업 역시 하이닉스 채권단이 호시탐탐 노려온 유력 인수 후보였지만 인수설이 나돌 때마다 현대중공업 측은 “관심 없다”며 내치기 일쑤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하이닉스를 대하는 현대중공업의 태도가 달라졌다.
지난 8일 유가증권시장본부는 현대중공업에 하이닉스 인수설에 대한 조회공시를 요구했다. 같은 날 현대중공업은 답변 공시를 통해 “하이닉스 인수와 관련해 현재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추후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는 시점 또는 1개월 이내에 재공시하겠습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재계와 증권가에선 “그 정도 공시 내용이라면 현대중공업이 하이닉스 인수를 추진하고 있다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보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채권단의 인수 제안을 꼼꼼히 살피고 나서 1개월 이내에 입장을 내놓을 것”이란 전망도 들려온다. 현대중공업이 인수 주관사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증권가에 파다한 상태다.
종전까지 하이닉스 채권단의 끈질긴 구애에도 불구하고 현대중공업이 하이닉스 인수에 시큰둥했던 것은 현대중공업 기존 사업과 반도체 사업 간의 시너지 효과가 거의 없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현대중공업이 입장을 바꿔 하이닉스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배경엔 최근 태양광 등 사업 다각화는 물론, 현대가의 고토 회복 의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중공업은 지난 2009년 현대종합상사에 이어 지난해 현대오일뱅크를 인수했다. 올 초엔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옛 현대가 핵심 기업들이 현대가의 품에 다시 안기고 있다. 현대종합상사 현대오일뱅크 인수에 이미 큰돈을 쓴 현대중공업이 하이닉스 인수전에 뛰어들 경우 어떤 형태로든 현대차그룹에서 지원이 따를 것이란 관측 또한 제기된다. 때마침 하이닉스 채권단이 현대중공업과 현대차그룹에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매각조건 완화를 제안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다.
한편에선 현대중공업의 하이닉스 인수 여부가 현대중공업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율에 미칠 영향이 거론되기도 한다. 현대중공업은 현대그룹 계열인 현대상선 지분 24%가량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여론 등을 고려해 현대상선 경영권을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될 경우 굳이 현대상선 지분을 갖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계산에 현대상선 지분 매각을 통한 하이닉스 인수 자금 마련에 나설 수도 있는 셈이다. 이 경우 현정은 회장의 현대상선에 대한 지배력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현대중공업의 하이닉스 인수 추진설이 구체화되면서 최근 현대중공업의 외연 확대 또한 주목받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지난 3월 주주총회를 통해 새 사외이사로 선임한 편호범 딜로이트안진회계법인 부회장은 감사원 기회관리실장 등을 거친 관료 출신이다. 현 정부에서도 기획재정부 국가회계제도심의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국회 예산정책처 예산정책자문위원회 위원도 역임했다. 현대중공업 계열사 현대미포조선이 3월 주주총회에서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한 김경환 한국주택학회 회장 역시 현 정부에서 대통령자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와 관련해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이 여권 거물인 까닭에 현 정부와 돈독한 인사들이 현대중공업 사외이사로 영입된 거라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최근 하이닉스 관련 말들이 많아지다 보니 대형 M&A 외압 전례가 들먹여지면서 현대중공업의 친 정부 인사 영입을 하이닉스 인수 추진에 대비한 외연 확대로 보는 시선 또한 많아지고 있다.
이외에도 하이닉스 이사진에 정몽준 의원에 우호적인 인사가 합류한 점 역시 현대중공업의 하이닉스 인수 추진에 힘을 보탤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지난 3월 하이닉스 주주총회에서 새 사외이사로 선출된 이달곤 전 행정안전부 장관은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법무행정분과위원과 18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등을 지내면서 여권 실세인 정 의원과 인연을 맺어온 인물이다.
여러 면에서 현대중공업의 하이닉스 인수 추진이 환영받는 듯 보이지만 장애물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이닉스 이사진엔 정몽준 의원에 반감을 가질 법한 인사들이 포진돼 있다. 정 의원과 앙숙인 현정은 회장의 현대그룹에서 전문경영인을 지냈거나 정 의원과 정치적 대립 세력이랄 수 있는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특보나 관료를 지낸 인사들의 이름이 하이닉스 이사진 명부에 몇몇 올라 있는 것이다.
지난 2009년 대통령 사돈기업인 효성이 하이닉스 인수에 나섰다가 논란 끝에 무산된 전례 탓에 여권 거물인 정몽준 의원의 현대중공업이 특혜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계적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에도 새 주인 찾기에 번번이 실패해온 ‘비운의 매물’ 하이닉스가 과연 현대중공업의 품에 안길 수 있을지에 재계의 시선이 쏠릴 듯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