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꼭 가을야구! 지옥훈련 자청했죠
▲ 지난 8년간 하위권에 맴돌던 LG 트윈스가 2위로 도약한 배경에는 이병규의 전방위 활약이 있었다. 그는 안타행진을 하는 동안엔 턱수염을 깎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 |
일반적으로 시즌 중에 프로야구 선수를 인터뷰하려면 많게는 30분, 적게는 10분 정도의 시간만 할애받는 게 고작이다. 더 이상의 시간을 내려고 해도 훈련과 미팅 시간, 경기 시작 전까지의 상황들을 고려하면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병규와의 인터뷰는 1시간을 훌쩍 넘겼다. 그가 인터뷰를 위해 ‘일찍’ 출근한 덕분이다. 그만큼 그에 대한 궁금증이 많았고, 그 또한 할 말이 많았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LG 팬들, 아니, 야구팬들이 가장 궁금해 하는 부분은 ‘지난해와 달리 올 시즌 왜, 무엇 때문에 이병규가 달라졌느냐’하는 내용이다. 인터뷰할 때마다 이병규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라고 한다.
“8년 동안 그만큼 수모를 당했으면, 더 이상은 안 되는 거잖아요. 더 내려갈 곳도 없고, 더 추락할 수도 없다는 공감대가 선수들 사이에서 형성된 것 같아요. 저 혼자서 잘한다고 되겠어요? 모든 선수들이 한마음으로 모였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들이죠. 사람들이 저한테 회춘했다고 하는데, 회춘보다는 마음가짐이 달라졌어요. 지난해 일본에서 복귀한 뒤 기자분들한테 ‘이병규 개인 대신 팀을 위해서만 야구하겠다’라고 약속했었어요. 팀을 위해 희생하고 싶었고, LG가 가을에도 야구하길 간절히 소원했기 때문에 그런 약속이 가능했던 거예요. 그런데 막상 시즌을 마치고 보니, 우리 팀도, 저도 빈 손이더라고요. 개인 성적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한 게 큰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지난 겨울부터 생각을 바꿨어요.”
팀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개인 성적이 살아나야 팀도 산다는 걸 다시 알게 된 것이다. 가급적이면 안타를 많이 치고 출루하고 득점하고, 그래서 타점을 내는 게 팀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의 변화다.
“제 성적을 올리기 위해 겨울부터 혹독한 훈련을 했어요. 전지훈련 동안에는 팀 훈련 외에 개인 훈련을 자청했죠. 처음에는 혼자했던 훈련이, 시간이 지날수록 선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거의 모든 선수들이 개인 훈련을 하게 된 거예요. 자율 훈련이다보니 훈련하면서 농담도 하고, 선배에게 타격폼에 대한 조언도 듣고, 폼도 수정해 보고, 정말 재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우리 팀의 팀워크로 승화된 것 같아요.”
2006년 일본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했던 이병규는 3년간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몇몇 사람들은 이병규의 일본 생활에 대해 ‘실패’란 단어로 정리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배움의 시간들’이었다고 표현한다.
“전 절대로 일본에서 보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아요. 1군이든, 2군이든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한 많은 일들을 겪었고, 그 경험들을 통해 제 야구 인생이 훨씬 더 성숙할 수 있었다고 믿어요. 만약 일본에 가지 않았더라면 제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당장 그 경험들을 야구장에서 풀어내지 못한다고 해도 나중에 지도자가 된 후엔 선수들에게 큰 선물로 전달할 거예요.”
하지만 일본에 진출한 시기에 대해선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다. 조금만 더 빨리 갔더라면 기대한 것 이상의 성적을 낼 수 있을 거란 미련 때문이다.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에만 갔더라도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 거예요. 물론 일본 진출할 무렵 걱정이 되긴 했었어요. 하지만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실패든, 성공이든, 아니면 제자리에 머물든,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죠.”
지난해 한국으로 복귀한 이병규는 한참동안 한국 야구가 낯섦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처음 보는 투수들, 기량이 뛰어난 젊은 선수들, 힘도 좋고, 변화구도 좋고, 그들이 어떤 공을 던지고, 변화구의 각이 어느 정도인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타석에 서는 게 쉽지 않았다. 올시즌에는 모든 선수들이 파악됐고, 자신감도 생겼으며, 이전보다 공 1~2개 정도 히팅포인트를 앞으로 당긴 부분 등이 절정의 기량을 과시하는 중심축으로 연결됐다.
“스프링캠프 동안 엄청난 훈련을 소화했고, 나름 기대를 갖고 시즌을 맞이했는데, 시즌 초반 대타로 기용되면서 자존심이 많이 상했어요. 정말 많은 준비를 했기 때문에 타석에 서고 싶은 간절함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경기 후반에 대타로 나섰다가 다음 경기 때는 아예 벤치만 달구고 있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속상했었죠. 기회가 오길 기다렸고, 한 번 온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부분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오기와 간절함이 절 자극시키고 일깨우게 했던 원동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병규는 “요즘 공 잘 던지는 나이 어린 선수가 너무 많다”면서 “그들과 상대하려면 실력 외에 더 중요한 게 있다”며 이런 설명을 곁들인다.
“어떻게 해서든 출루하려고 몸부림을 쳐요(웃음). 볼에도 방망이가 나가고, 실투는 절대 안 놓치려고 하고, 안타를 못 치면 포볼을 얻어서라도 출루를 해요. 좋은 투수가 많다고 해서 넋 놓고 바라볼 수만은 없잖아요. 그들을 이기기 위해선 별 짓을 다 해야 하는 거죠. 그게 이전과 조금은 달라진 부분인 것 같아요. 나이도 먹고, 경험도 많아지니까 큰 것보다는 작은 것을 더 챙기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되네요.”
그래도 이병규는 KIA 타이거즈 윤석민과 지금은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가 있는 넥센 히어로즈 강윤구의 직구야말로 가장 치기 어려운 공이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무심타법’을 구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병규한테도 기록에 대한 욕심은 살아 있었다. 그는 양준혁이 세운 2318개의 안타 기록을 깨보고 싶다고 고백했다.
“제 목표가 2500개 안타를 치는 거예요. 한화 장성호는 단순히 양준혁 선배의 최다 안타 기록을 깨보고 싶다고 했지만 전 분명한 숫자를 밝혔어요. 2319개의 안타를 쳐서 기록을 깨는 것보단 또 다른 이병규만의 안타 기록을 세워보고 싶은 거죠. 설령 이뤄지지 못한다고 해도, 양준혁 선배의 기록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올 시즌 200안타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턱수염을 기르고 있는 이병규는 올 시즌 후배들 앞에서 ‘앞으로 안타를 못 칠 때까지 수염을 기르겠다’라고 공언한 바 있다. 즉 안타를 치지 못할 경우에는 수염을 깎겠다는 의미였다. 아직까진 계속 안타를 생산하는 중이라 수염을 자를 기회가 없었는데, 바람이라면 그 수염이 턱 밑으로까지 계속 내려가는 것이라고.
일본에서 LG로 복귀할 무렵, 일부 팬들은 ‘나이 먹은 선수를 굳이 비싼 돈 주고 다시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이병규의 합류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노출하기도 했었다. 어떤 팬은 ‘이참에 은퇴해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병규도 이런 사실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다고 한다.
“언젠가 저도 은퇴를 할 날이 오겠죠. 하지만 은퇴하는 모습조차 아름다운 선수였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그 은퇴 시기는 구단이 아닌, 제 자신이 정할 겁니다. 구단도 절 ‘레전드’라고 생각해준다면 제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줬으면 좋겠어요. 저 또한 실력도 없는데, 선수 생활에 대한 미련 때문에 생명 연장을 하고 싶진 않아요.”
이병규는 지도자에 대한 꿈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순리대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가능한 시나리오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다보면 다른 부분들은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은퇴하기 전에 다시 한 번 태극마크를 달고 WBC대회에 서고 싶어요. 뽑아만 주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고, 제가 그동안 받은 것들 이상의 수확을 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제 인생의 대부분이 야구로 채워졌고, 야구를 통해 얻은 게 많은 만큼 그걸 되갚을 시간도 있어야 되겠죠. 혹시 그거 아세요? 일이 고달프고 힘들면서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런 기분이요. 딱 제가 요즘 그래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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