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쌓기’ 넘어 ‘DJ 정권’ 겨누나
해외 비자금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는 사정당국이 최근 한 중견기업에 대한 수사에 나서 정·재계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5월 26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부장검사 이성윤)는 골프 카트와 골프장 관리장비 공급업체인 H 사의 탈세 의혹과 관련, H 사 본사와 유 아무개 회장의 자택 등 4~5곳을 압수수색했다.
이번 검찰 수사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는 최근 역외탈세 환수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국세청 고발에 의해 수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국세청에서는 유 회장이 김대중 정부 시절 실세 인사들과 가깝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자금 흐름에 대해서도 살펴봤다는 후문이다. 따라서 검찰의 칼날이 H 사를 넘어서 정치권으로 향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전망도 흘러나오고 있다.
국세청이 H 사에 대한 세무조사에 착수한 것은 지난해 말이다. 세무조사는 국세청의 중수부 격인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이 나섰다. 당시 국세청은 이 회사가 대기업이 아닌데도 일본에 5개 골프장을 비롯해 일본과 미국에 수천억 원 규모의 해외 부동산을 확보한 정보를 입수했고, 재산 취득 과정에서 탈루나 탈세가 없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다.
H 사는 1988년 설립된 골프카트와 골프장 관리장비 공급업체로 유 회장은 한 대기업 계열 상선회사 도쿄 주재원으로 일하면서 ‘일본통’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유 회장에 대해 잘 아는 한 인사는 “일본에서 일하며 유명 골프카트업체 고위직과의 인연으로 국내에 이 카트를 독점 납품하면서 부를 축적했다”고 말했다. 유 회장은 2004년 일본의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파산한 골프장을 잇달아 매입, 현지 골프업계에서 주목받았으며 미국에서도 상당 기간 부동산 투자를 해온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지바현과 후쿠오카현에 5개의 골프장과 1개의 호텔을 가지고 있는 H 사는 현재 해외에 가장 많은 골프장을 소유하고 있는 국내 기업이다. 유 회장은 일본 골프계에서도 ‘골프왕’이란 별명으로 통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유 회장 개인도 미국 로스엔젤레스와 베벌리힐스 등지에 호화 콘도와 쇼핑센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세청의 유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는 역외탈세 근절 강화 방안의 일환이기도 했다. 국세청은 유 회장의 탈세 규모가 최근 ‘선박왕’ 권혁 시도상선 회장(4100억 원 추징), ‘구리왕’ 차용규 씨(5000억 원대 추징 예상)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역외탈세의 전형적인 수법으로 판단하고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했다. 국세청은 유 회장이 부동산 취득 과정에서 100억 원가량을 탈세했다고 판단하고 지난 4월 추징과 함께 그를 검찰에 고발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이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에 배당한 후 탈세 의혹을 수사해왔다. 검찰 수사의 초점은 유 회장이 수천억 원에 달하는 부동산 매입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느냐는 점이다. 유 회장이 부동산 임대업과 골프카트 수입업을 하고 있지만 이를 통해 모은 돈으로 수천억 원 규모의 해외 부동산을 구입했다는 것이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와 함께 검찰은 외국환거래법 위반 가능성을 비롯해 회사 돈 관리 과정의 횡령이나 재산 국외도피 여부 등을 면밀히 따져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수사의 또 다른 관심은 정치권으로 확대될지 여부다. 국세청과 검찰이 입수한 첩보에는 광주 명문고 출신인 유 회장이 김대중 정부 실세들과 가깝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국세청도 이 부분과 관련한 자금 흐름을 세무조사 과정에서 살펴본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검찰 안팎에서는 K 전 의원을 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유 회장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한 번도 세무조사를 받지 않은 점 또한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한 중견기업 탈세 의혹을 수사하는 검찰이 과연 이를 통해 또 한 번 전 정권 사정에 나설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