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그린’이 날 부른다
▲ 선운산 숲길. |
어디로 떠나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을까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전북 고창으로 떠난다. 서로 다른 매력의 녹색 물결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선운산 숲길의 연록, 청보리밭의 진록, 고창읍성 솔숲의 암록. 이른바 고창의 세 가지 색 ‘그린’(green)이다.
등산이라면 기겁하는 사람들도 그다지 부담을 갖지 않을 산이 선운산이다. 고창을 대표하는 이 산은 그 경치가 무척 아름다워서 ‘호남의 내금강’이라고 불린다. 그 비유가 틀리지 않았음은 선운산 숲길에 드는 순간 확인된다. 선운사 매표소를 지나면서부터 숲길이 시작된다. 가을이면 꽃무릇과 단풍으로 불타는 길이다. 선운사를 향해 들어가다 보면 도솔천을 사이에 두고 길은 찻길과 ‘사람길’로 나뉜다. 물론 사람길을 택한다. 산책하기 좋은 조붓한 길이다. 햇빛을 잔뜩 머금은 연록의 나무 이파리들이 싱그러움을 더하는 이 숲길에 들면 마음의 묵은 때들이 절로 씻겨 내려가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느릿느릿 그 길을 1㎞쯤 걸어가면 나오는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시절(577년)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된 절이다. 대한불교 조계종 24교구의 본사인 선운사는 한때 무려 89개의 암자와 189채의 건물을 거느린 대가람이었다. 하지만 정유재란 때 본당을 제외하고 모두 화를 입고 소실됐다. 지금의 만세루, 영산전, 명부전, 대웅전 등의 건물들은 광해군 때(1613년) 다시 지은 것들이다. 선운사에는 지장보살좌상, 금동보살좌상 등 보물 5점 외에 문화재들이 다수 있다.
선운사의 자랑거리 한 가지가 더 있다. 대웅전 뒤편 동백나무군락이다. 그 어느 곳의 동백나무들보다 큰 동백나무들이 3000그루가량 모여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것은 600세를 넘겼다. 겨울에 피어 동백이건만, 선운사의 것은 아주 늦게 피는 편이다. 3월이 넘어서 만개한다. 정신머리 없게도 동백꽃은 지금에 가도 볼 수 있다. 아무리 지난 겨울이 추웠고, 봄 또한 늦게 왔다지만 너무했다는 생각이 든다.
길은 선운사를 지나고 진흥굴로 이어진다. 신라시대 진흥왕이 퇴위한 후 수도했다는 굴이다. 규모는 깊이 10m 정도로 크지 않다. 길은 도솔암까지 거의 평지나 다름없이 진행된다. 매표소에서부터 도솔암까지는 3㎞가량 된다. 빠른 걸음으로는 30분이면 닿지만 연록의 숲에서 허우적거리다보면 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난다. 선운사에 들러 절을 휘 둘러보고, 만세루에서 차 한 잔 마시노라면 소요시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다.
고창은 풍천장어뿐만 아니라 복분자와 작설차가 유명한 곳이다. 선운사의 두 길 중 찻길에 복분자를 파는 좌판이 즐비하다. 작설은 만세루에서 맛본다. 찻잎은 따는 시기에 따라서 종류가 나뉜다. 4월 중순에서 5월 초순까지 채엽한 첫물차는 맛이 향기롭고 그윽하다. 특히 청명(4월 4~6일경)과 곡우(4월 20일) 사이에 따서 만든 차를 ‘우전’이라고 해서 최상으로 친다. 선운사 작설차는 입하(5월 5~8일)까지 따서 만든 ‘세작’으로 이 역시 고급 차에 속한다. 선운사 앞 극락교 너머에 차밭이 있다. 모든 문을 다 열어젖히고 길손들의 휴식처를 자처하는 만세루에는 누구든지 와서 이용할 수 있도록 따뜻하게 데운 찻물과 차, 다기들을 준비해 놓고 있다.
도솔암에는 선운사의 보물 중 하나인 마애불이 있다. 높이 20m의 거대한 바위 면을 가득 채운 마애불이다. 고려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이다. 마애불을 정면에서 정확이 보려면 천마봉을 올라야 한다. 이제 겨우 등산의 맛이 나는 가파른 경사길이 천마봉까지 계속된다. 그래봐야 해발 336m의 산이고, 도솔암부터 천마봉까지 채 1㎞도 되지 않으니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선운산 숲길의 연록보다 조금 진한 진록의 보리밭으로 향한다. 공음면에 자리한 학원농장에는 보리밭이 바다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학원농원은 1960년대 초 계획·조성된 대형 종합 농원이다. 장미, 카네이션 등을 기르는 화훼단지와 대추, 밤, 은행, 모과 등을 수확하는 과수원이 있다. 하지만 학원농장을 알린 것은 향기가 뛰어난 꽃들도 아니고, 맛있는 과일들도 아니다. 예전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보리, 가난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그 보리다. 요즘이야 건강식이라고 해서 대접을 받는 편이지만,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형편이 안 되어 마지못해 먹던 것이 보리밥이었다. 그 보리가 이제 어엿한 여행상품이 되었다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얼마 후면 황금으로 익어갈 보리지만 지금은 청년의 푸름을 간직하고 있다. 진록의 건강함이 느껴지는 보리들은 바람에 부대끼며 ‘사르륵 사르륵’ 거친 숨소리를 뱉는다.
허리춤까지 자란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보리밭 산책을 한다. 까끌까끌한 것이 마치 ‘스포츠머리’로 깎아 놓은 학생들 머리를 매만지는 것 같다. 보리밭에는 사람들이 편안히 산책할 수 있도록 곳곳에 사잇길을 내었다. 햇빛을 피하라고 원두막도 세웠다.
드문드문 보리와 함께 유채도 심어 놓았다. 진록의 보리와 노란색 유채가 빚어내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이 봄이 지나면 이곳의 보리밭은 지워지고 그 자리에 메밀이 꽃피게 된다. 하얀 메밀꽃밭 가운데는 해바라기도 심어서 사람들을 유혹한다. 봄의 빠른 걸음이 학원농장에서는 전혀 아쉽지 않다.
보리밭을 떠나 고창읍성으로 길을 잡는다. 녹색의 스펙트럼 중 가장 아래에 깔린 암록의 소나무숲이 이곳에 있다. 선운산 숲길의 활엽과 학원농장의 청보리가 다소 기분을 달뜨게 한다면, 고창읍성 소나무의 어두운 녹색은 기분을 차분하게 만든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해 전라도민들이 축성한 성곽으로 모양성이라고도 부른다. 성의 둘레는 총 1684m. 높이 4~6m, 면적은 5만 172평이다. 갈고리처럼 생긴 옹성과 숨어 있는 치성, 왜적이 건너오지 못하도록 만든 웅덩이와 장애물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춰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이 있다.
초봄이면 성 안팎으로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는데, 성 밖에는 거의 다 진 상태지만 성내에는 아직 한창이다. 성곽을 완주하는 데는 30분쯤 걸린다. 약간의 오르내림이 있지만 힘에 부칠 정도는 아니다.
성내에는 맹종죽숲도 있지만 역시 고창읍성 최고의 매력은 노송숲이 아닐까 싶다. 하늘을 가릴 듯 커다란 노송들이 성곽을 따라 안쪽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성곽산책을 하다보면 도무지 그 솔숲의 부름을 모른 척할 수 없다.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
여행안내
▲길잡이: 서해안고속국도 선운사IC→22번 국도→삼인교차로에서 좌회전→선운사
▲먹거리: 선운사 앞 인천강에서 자라는 풍천장어는 스태미나 음식으로 고창 최고의 먹거리 중 하나. 풍천장어전문점은 선운사 입구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대부분 20~30년 전통을 가진 집들이다. 풍천장어쌈밥(063-562-7520), 연기식당(063-562-1537), 가마골가든(063-561-3155) 등이 유명하다.
▲잠자리: 선운사 관광단지에 선운산관광호텔(063-561-3377), 동백호텔(063-562-1560) 등이 있다. 고창읍내에는 동방호텔(063-561-3102), 아리랑모텔(063-561-5595), 그랜드모텔(063-561-0037) 등이 있다.
▲문의: 고창군문화관광과 063-560-2457
▲길잡이: 서해안고속국도 선운사IC→22번 국도→삼인교차로에서 좌회전→선운사
▲먹거리: 선운사 앞 인천강에서 자라는 풍천장어는 스태미나 음식으로 고창 최고의 먹거리 중 하나. 풍천장어전문점은 선운사 입구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대부분 20~30년 전통을 가진 집들이다. 풍천장어쌈밥(063-562-7520), 연기식당(063-562-1537), 가마골가든(063-561-3155) 등이 유명하다.
▲잠자리: 선운사 관광단지에 선운산관광호텔(063-561-3377), 동백호텔(063-562-1560) 등이 있다. 고창읍내에는 동방호텔(063-561-3102), 아리랑모텔(063-561-5595), 그랜드모텔(063-561-0037) 등이 있다.
▲문의: 고창군문화관광과 063-560-24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