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수한 대화록에서 확인되는 대화 내용은 이렇다. 대화는 쇼트트랙 대표팀 동료였던 노아름이 최민정에게 말을 걸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때 시간은 오후 11시 17분이었다. 노아름은 최민정에게 “민정아 선생님 술 드신 것 같니..?”라고 물었다.
노아름 질문에 등장하는 ‘선생님’은 당시 쇼트트랙 국가대표팀 J 코치다. 대한빙상경기연맹 규정상 훈련 기간 지도자의 음주 행위는 금지돼 있다. 훈련 중 적은 양의 음주만으로도 지도자 직을 박탈당한 사례가 있다.

여기서 ‘이사님’은 당시 대한빙상경기연맹 경기이사를 지내던 B 이사다. B 이사는 실업 빙상단 전북도청 감독직을 겸하고 있는 인물이다. 최민정에게 먼저 질문을 건넨 노아름의 당시 소속팀은 전북도청이었다. 최민정은 노아름에게 J 코치 음주 사실을 알리면 B 이사를 통해 C 교수에게까지 이야기가 흘러들어갈 것을 예상했다. 그러면서 ‘C 교수가 사실을 안 뒤에도 J 코치가 곤경에 처하는 것을 막아줄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 C 교수는 당시 빙상연맹 부회장으로 한국체대 빙상부 교수직을 겸임하고 있었으며 자타공인 ‘빙상 대통령’으로 통했다.

최민정이 J 코치와 통화를 하는 중이지만 소지한 스마트폰 기종이 통화 녹취 기능을 지원하지 않았다는 부분을 설명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J 코치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최민정과 통화를 하고 있던 상황이다.
오후 11시 34분 최민정은 “통화하면서 녹음이 안되니까”라고 했다. 오후 11시 37분 김아랑은 “아직 얘기 중?”이라고 최민정에게 물었다. 11시 50분경 김아랑은 최민정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최민정과 J 코치 통화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최민정 휴대전화는 녹음기능이 없었다. 그래서 최민정은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뒤, 이를 김아랑이 녹음한 것이다. 최민정과 J 코치 통화는 11시 23분경부터 12시 7분까지 계속된 것으로 추정된다.

B 이사와 C 교수에게 말이 샐 수 있기 때문에 노아름에게 ‘잘 모르겠다’고 답한 최민정을 향해 김아랑이 ‘잘했다’고 한 상황으로 풀이된다. 한 빙상인은 “이 사실이 C 교수에게 들어가면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불호령이 떨어질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저런 대화가 오간 것”이라고 주장했다.


J 코치는 대표팀 코치로 합류하기 전 한국체대 빙상장에서 개인강습을 한 경력이 있다. 여기다 J 코치는 2017년 당시 빙상계 내부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과시했던 ‘한체대 라인’ 코치진의 떠오르는 핵심 인물이었다. ‘한체대 라인’ 중진급 지도자로는 앞서 언급된 B 이사도 있다. B 이사는 전북도청 감독이지만 우편물을 한국체대 빙상장에서 받을 정도로 그곳을 자주 방문했다. 그리고 그들을 아우르는 리더가 바로 C 교수였다.
대화록에 따르면 최민정과 김아랑은 이른바 ‘라인의 실체’를 잘 이해하면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최민정은 2017년 연세대에 입학하며 사실상 한국체대 빙상장을 등진 입장이었다. 최민정은 이후 ‘한체대 라인’과 사이가 좋지 않던 성남시청 빙상단에 입단했다. 김아랑은 한국체대를 졸업한 뒤 역시 ‘한체대 라인’에 포함되지 않는 고양시청 빙상단에 입단 예정인 상황이었다. 김아랑 역시 한체대 라인과 결별을 앞둔 상황이었다.

B 이사는 조 전 코치가 경질당한 뒤 신임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로 긴급 파견됐다. 박세우 전 여자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다. 박 전 코치는 최근 빙상연맹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경기이사 재직 당시 무자격 코치를 국제대회 선수단에 포함시킨 까닭이다. 빙상계 유력 관계자에 따르면 “박 전 코치는 ‘당시 부회장단’이 시킨 일을 했을 뿐”이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는 후문이다.
C 교수는 전명규 전 한국체대 교수다. 2018년 4월 빙상연맹 부회장직을 사임했다. 2019년 8월엔 한국체대에서 중징계를 받아 파면 처리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빙상인은 “2017년과 2018년 당시 빙상계 상황은 녹취를 하지 않으면 미끄러지는 ‘오징어 게임’ 같은 상황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교수부터도 코치들과의 대화를 녹취하고, 코치들은 선수들과의 대화를 녹취한다. 선수들 역시 모든 대화를 녹취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의 굴레가 모두의 녹음기를 켜지게 만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빙상계 유력 관계자는 “결국 심석희를 둘러싼 불법 도청 의혹을 만든 근본적 원인은 뿌리 깊은 지도자들의 윤리 의식 부재 때문”이라면서 “최민정과 김아랑의 경우엔 지도자가 음주 상태로 전화를 하는데 녹취를 안 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