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초반 부진 이겨내고 대기록 수립…합류 후 팀에 긍정적 영향 ‘성적 그 이상’
이런 상황에서 시대를 역행하는 선수들이 눈에 띈다. 그중 올 시즌 KBO리그에 첫 발을 내디딘 40세 추신수(SSG 랜더스)의 활약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추신수는 21일 현재 타율 0.260 20홈런 114안타 64타점을 기록 중인데 볼넷이 무려 98개다. 정규시즌 종료까지 6게임 남은 상황에서 100볼넷 달성이 유력해 보인다. 더욱이 지난 5일에는 KBO리그 역대 최고령 20-20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올해 20-20은 추신수 외에 삼성 구자욱만 달성한 상태다. 타율이 높진 않지만 주루 센스와 파워만큼은 후배들 못지않다.
팀의 와일드카드 진출을 위해 정규시즌 마지막까지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 큰 귀감이 되고 있는 추신수. 그는 과연 내년에도 SSG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100볼넷의 의미
KBO리그 역대 최고령 100볼넷 기록은 당시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던 양준혁이 갖고 있다. 양준혁은 37세 3개월 26일의 나이로 100볼넷을 기록했다. 만약 추신수가 100볼넷을 넘어선다면 양준혁보다 2년 정도 더 많은 나이에 100볼넷을 달성한 셈이다.
메이저리그를 비롯해 현대 야구에선 출루율의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타율보다 출루율을 중시하는 시대로 바뀌면서 타자들의 접근법도 변했다. 높은 타율도 중요하지만 공을 잘 치는 것만큼 잘 보고 걸러내는 게 실력으로 평가받는 것이다.
추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뛰어난 선구안을 발휘해 볼넷을 얻어 나갔다. 볼넷이든 안타든 출루를 통해 팀의 득점에 기여하는 게 그가 갖고 있는 야구관이다. 그러나 시즌 초반에는 자신만의 장점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투수의 구속은 메이저리그에 비해 떨어지지만 KBO리그 심판들의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하기 쉽지 않았고 스프링캠프 없이 시범경기에 들어서면서 오랫동안 투수들의 공을 보지 못한 부분이 경기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그가 가장 괴로워했던 부분이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공에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는 점. 타격이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 나가려고 자신의 선구안을 내려놓고 타격감에 의지했던 상황이었다.
추신수는 절치부심 끝에 시즌 중반부터 서서히 KBO리그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적응이 되면서 스트라이크 존에서 벗어난 공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볼을 잘 골라내니 볼넷이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 스트라이크 존에 근접한 볼에도 탁월한 선구안으로 구별해내는 능력을 선보였다. 뛰어난 선구안을 자랑하는 타자를 상대하는 투수들은 머리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웬만한 유인구로 헛스윙을 이끌어내기가 어렵기 때문.
#KBO리그 최고령 20-20클럽
추신수는 10월 5일 잠실 LG전에서 시즌 20호 홈런을 터트리며 39세 2개월 22일의 나이로 역대 최고령 20홈런-20도루 달성자로 이름을 올렸다. 종전 역대 최고령 20-20 기록은 이번에도 양준혁이었다. 양준혁은 2007년 10월 5일 사직 롯데전에서 38세 4개월 9일의 나이로 20-20을 달성했다.
추신수는 메이저리그에서 2009년, 2010년, 2013년 3차례 20-20클럽에 가입한 바 있다. 그때는 젊은 나이였지만 30대 중반 이후 20-20 달성은 올해가 처음이다. 볼넷을 늘리는 눈야구에다 탁월한 주루 센스가 돋보이는 발야구까지 인정받은 것이다.
당시 추신수는 20-20 달성 후 기자와 주고받은 문자에서 자신도 한국에서 20-20을 기록할지 몰랐다고 말했다. 시즌 초반에는 야구가 안 돼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어느 순간에 이런저런 기록을 달성하고 있다면서 시즌 마치고 할 말이 많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추신수는 올 시즌 내내 왼팔꿈치 통증을 안고 뛰는 중이다. 지난 올림픽 휴식기 동안 2주간 미국 집에 다녀왔을 때 자신의 주치의로부터 팔꿈치 진료와 치료를 받았지만 치료만으로 호전되기 어려웠다. SSG 김원형 감독은 추신수의 몸 상태를 고려해 주로 지명타자로 내보냈지만 선수 스스로 자신의 몫을 다하지 못한다는 부담을 안고 뛰었다.
그럼에도 추신수는 전반기의 부진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후반기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고, 마침내 KBO리그 역대 최고령 20-20클럽에 입성한 것이다. 베테랑 선수들은 부상 위험으로 도루를 꺼리는 편이다. 추신수도 텍사스 레인저스 후반기 시절에는 부상을 염려해 도루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올시즌 KBO리그에서 전성기 때 못지않은 도루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기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좋은 영향"
추신수는 올 시즌 SSG와 계약하며 KBO리그 역대 최고 연봉인 27억 원을 받았다. 이중 10억 원은 기부했다. 시즌 초반 SSG는 야구 통계 예측 시스템을 통해 추신수의 2021시즌 예상 성적으로 타율 0.306 출루율 0.428 장타율 0.595 대체선수대비승리기여도(WAR) 5.71을 제시했다. 10월 21일 현재 추신수의 올 시즌 성적은 SSG가 처음 내세운 예상 성적과 거리가 있다. 타율은 0.260 출루율 0.407 장타율 0.441 WAR 2.816이다.
그러나 SSG 김원형 감독은 기자들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추신수는 기록으로 표현할 수 없는 좋은 영향을 팀에 미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홈 경기 때는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팀 훈련이 시작되기 전 자신의 루틴을 소화하고, 출루에 성공한 뒤에는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 추가 진루를 위해 전속력으로 뛰는 것은 물론 팀이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 후배들에게 소리 없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추신수의 합류로 SSG 선수단 분위기가 상당한 변화를 이뤘고, 이 변화가 선수단 전체에 긍정적인 발전을 이끌어내고 있다는 게 김 감독의 평가다.
추신수는 SSG와 계약을 맺은 후 자신의 연봉 27억 원에서 10억 원은 사회공헌활동에 기부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즌 중임에도 동분서주했다. 추신수는 최근 모교인 수영초, 부산중, 부산고에 각각 1억 원, 2억 원, 3억 원씩 총 6억 원의 기부금을 전달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연고 지역인 인천에서도 인천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인천지역 소재 15개 학교 야구부, 보육원과 소규모 공동생활가정인 그룹홈(Group home)에도 환경개선을 위한 다양한 기부 활동을 이어나가기로 했다.
SSG 동료 선수들한테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연봉 5000만 원 미만, 1군 출장 경기 수 30경기 미만의 선수 총 49명에게 총 4000만 원 상당의 야구 장비를 지급했다. 그는 이런 아이디어를 낸 배경으로 메이저리그 생활을 꼽았다. 메이저리그에서는 연봉이 높은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저연봉 선수들, 특히 마이너리그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KBO리그에서도 이런 문화가 정착되길 바라는 마음에 자신이 먼저 그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추신수-SSG 동행, 내년에도?
추신수는 올 시즌을 끝으로 SSG와의 1년 계약이 마무리된다. 구단은 물론 선수도 내년 시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추신수는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내년 거취 관련 이야기가 나오자 “내가 2루 주자로 나가 있을 때 평범한 안타에 득점을 못한다면 그때가 은퇴 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은 더 뛸 힘이 남아 있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리라.
추신수의 절친인 정근우는 최근 유튜브 ‘썸타임즈-정근우의 야구 이슈다’에서 추신수가 내년에도 SSG에서 뛸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 이유로 올 시즌 기대에 못 미친 성적과 선수 생활을 통해 꼭 이루고 싶은 우승 반지를 아직 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SSG에서도 추신수와의 동행을 계속 이어가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정은 추신수의 몫으로 남았는데 시즌 종료 전후로 결정을 발표하지 않을까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