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철 타격왕 되자 ‘기습 번트 허용 느슨한 수비’ 의혹 제보…‘짜고치는 고스톱’ 문자에 발칵
제보자는 "국군체육부대(상무) 야구단 소속 내야수 서호철(25)이 지난 10월 8~9일 2군 경기에서 상대 팀인 KIA 타이거즈의 도움을 받아 남부리그 타격왕에 올랐다"고 주장했다. 서호철은 이 2경기에서 연속 멀티히트로 타율 0.388을 기록하면서 롯데 자이언츠 김주현(0.386)을 근소한 차로 제치고 타격 1위를 확정했다.
#번트안타가 의심의 씨앗?
제보자는 2연전에서 서호철이 친 안타 4개 중 2개가 번트안타라는 점을 문제 삼았다. 서호철은 8일 3회 두 번째 타석에서 기습 번트를 대 투수 앞 내야안타를 만들어냈고, 9일에도 1회 첫 타석에서 3루수 쪽 번트안타로 출루했다.
제보자는 "서호철은 올 시즌 번트안타가 하나도 없었고, 오른손 타자라 번트를 내야안타로 만들기도 쉽지 않다"며 "상무 박치왕 감독이 제자인 서호철을 타격왕으로 올리기 위해 KIA에 부탁했다는 정황이 있다. 실제로 KIA 3루수가 서호철의 번트 타구를 적극적으로 수비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고의로 안타를 만들어줬다"는 주장을 펼쳤다.
클린베이스볼센터는 즉각 조사위원회를 꾸려 사실관계 확인에 나섰다. 정금조 클린베이스볼센터장은 "관련 팀들로부터 경위서를 받았고, 해당 경기 때 현장에 있던 KBO 경기운영위원과 기록위원, 심판은 물론이고 KIA와 상무 2군 감독, 선수, 현장 관계자들의 얘기를 듣고 있다. 최대한 자세히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다각도로 검토 중"이라고 했다.
KIA와 상무는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마자 나란히 "특정 선수를 타격왕으로 밀어줘야 할 이유가 없다"며 강력하게 부인했다. 특히 제보자가 '밀어주기'의 원인으로 짐작했던 '상무의 갑질'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상무는 2019년 경찰야구단 해체 후 현역 선수가 야구를 하면서 군복무 할 수 있는 유일한 팀으로 남았다. 구단들 입장에선 군에 입대하는 소속 선수를 한 명이라도 더 상무에 보내고 싶은 게 당연하다. 제보자가 "아마 KIA가 상무 감독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억측을 한 배경이다.
하지만 상무 감독에게는 더 이상 선수 선발 권한이 없다. 2018년부터 상무 야구단도 다른 종목과 마찬가지로 국방부 인력이 포함된 선수 선발위원회가 1차 서류전형과 2차 체력·신체·인성 검사를 거쳐 최종 명단을 추린다. 이름값 높은 선수가 지원해 감독이 뽑고 싶어 하더라도 이 두 번의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면 상무에 갈 수 없다는 얘기다.
한 구단 관계자는 "실제로 유명한 선수가 프로 1~2군 성적으로 평가하는 1차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도 2차 체력 테스트에서 탈락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며 "예전엔 각 구단 사정을 살피느라 형평성을 고려해 팀별로 선수를 안배했는데, 요즘은 그런 문화도 사라져서 오히려 한 팀 쏠림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증언했다. KIA 입장에선 굳이 '안타 조작'까지 해가며 상무에 잘 보일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서호철은 원래 KIA가 아닌 NC 다이노스 소속 선수다. 코로나19 방역 문제로 밀려 있던 잔여 휴가를 소화한 뒤 12월 NC로 복귀해 다음 시즌을 준비한다. 상무는 "서호철은 번트안타 외에도 9일 마지막 타석에서 2루타를 치는 등 안타 2개를 더 쳤다. 그 덕에 타격왕이 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번트 없던 선수라 정상수비 했을 뿐"
날벼락을 맞은 KIA는 서호철의 번트안타 장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면서 적극 해명에 나섰다. KIA에 따르면 서호철은 8일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왼쪽으로 기습번트를 대 출루에 성공했다. KIA 투수 남재현이 타구를 잡아 1루로 던지려다 한 차례 더듬었고, 그 사이 서호철이 1루에서 세이프 돼 안타로 기록됐다.
KIA는 이와 관련해 "루상에 주자가 없으니 번트 수비를 할 이유가 없다. 서호철은 번트를 대지 않는 타자라 더 그랬다. 번트 시프트를 하지 않은 게 오히려 정상"이라고 역설했다. 이날 남재현이 호투해 상무 타선이 쉽게 안타를 치지 못했고, 서호철이 기습적인 번트안타로 돌파구를 찾은 상황이라는 거다.
KIA는 또 "9일 경기에서 서호철이 다시 3루 선상으로 번트를 댔을 때는 3루수 강경학이 한두 발짝 앞으로 나와 전진 수비한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타구가 라인을 벗어나 파울이 될 것으로 보였고, 이 때문에 강경학이 빠르게 대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공이 선을 넘어가지 않고 안쪽에 멈춰 행운의 안타가 됐다"는 설명이다. 야구 경기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장면인데, 타격왕 싸움과 엮여 오해의 소지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상황들이 2군 경기에서 벌어진 탓에 KBO가 근거로 삼을 영상을 확보할 수 없다는 게 문제다. 매 게임 TV로 중계되는 1군 경기와 달리, 2군 경기는 경기장에 설치된 CCTV 등으로도 확인하기 쉽지 않다. 당사자와 목격자, 관계자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클린베이스볼센터는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파악하려면 최대한 여러 명을 만나 다각도로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했다. KIA는 "조사위원회가 끝난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게 판명되면 명백한 구단 명예훼손이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선전포고했다.
#문자 메시지 진실게임
의혹이 수면 위로 떠오른 지 하루 만에 사태는 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서호철에게 2리 차로 밀려 남부리그 타격왕을 놓친 김주현이 해당 2연전에 앞서 KIA 2군 포수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가 19일 공개됐기 때문이다. 김주현은 "볼넷도 좋고 사구도 좋으니 서호철에게 안타는 맞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송했고, KIA는 이 내용을 클린베이스볼센터에 경위서와 함께 제출했다. 친한 선수들끼리 주고받는 가벼운 농담으로 보일 수 있지만, 상황에 따라 충분히 제3자의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내용이다.
롯데 관계자도 "김주현이 그런 메시지를 보낸 게 맞다. 다만 '강요'나 '청탁'의 느낌은 아니었다고 들었다"며 "시기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내용인 것은 인정한다. 구단 내부적으로도 엄중한 문제로 보고 있다"고 했다. 롯데 역시 김주현에게 확인한 내용을 KBO에 공유했고, 김주현은 클린베이스볼센터를 찾아 메시지를 보낸 의도와 자신이 받는 의혹에 대해 해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20일엔 또 다른 사적 대화 내용이 공개됐다. KIA 외야수 김호령이 평소 알고 지내던 김주현에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며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KIA 3루수였던 강경학도 김주현과 대화 도중 "너 타격왕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안타깝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알려져 논란이 더 커졌다. 사태가 갑작스러운 '진실게임' 양상으로 변질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KIA는 곧바로 김호령과 강경학을 불러 추가로 내부 조사를 했다. 이어 선수들과 면담을 마친 20일 저녁 "상무 측으로부터 팀이 어떠한 요청이나 부탁을 받은 적이 없고, 우리 선수에게도 따로 지시한 게 없다는 점을 재차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김호령은 구단 조사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내용과 관련해 "이틀 연속 번트안타가 나왔으니 롯데 선수(김주현)의 의혹이 맞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위로 차원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제보자 측이 '박치왕 감독이 KIA 더그아웃을 방문해 첫 타석 번트를 요구했다'고 주장한 데 대해선 "내가 직접 들은 적은 없다"고 강조했다.
KIA는 김호령의 해명 내용을 전하면서 "서호철이 첫 번트안타에 성공하자 더그아웃에 있던 코치들이 '첫 타석에서 번트를 성공했으니 두 번째 타석에선 안타를 노리고, 실패하면 세 번째 타석에서 또 번트를 댈 수 있겠다'고 말하는 걸 듣고 상황을 오해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KIA는 또 "조사 과정에서 해당 롯데 선수가 우리 구단 소속 포수 1명 외에 추가로 포수 1명, 야수 1명에게 (서호철에게 안타를 맞지 말라는) 부탁을 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상무와의 경기 전후로 해당 롯데 선수와 연락을 주고받은 KIA 선수는 그 외에도 3명 더 있다"고 강조했다. 김주현이 총 6명의 KIA 선수에게 연락해 관련 얘기를 묻거나 한탄할 정도로 남부리그 타격왕 경쟁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는 암시다.
"KIA가 상무의 청탁을 받고 타격왕을 만들어줬다"는 제보자 주장이 허위로 판명되면, 군 생활 마지막 2경기에서 최고의 결과를 낸 서호철은 억울한 피해자가 된다. 이동욱 NC 감독은 소속 선수인 서호철이 논란에 휩싸인 점을 아쉬워하면서 "해당 내용의 진실 여부는 KBO에서 조사를 해보면 가려질 거다. 다만 서호철에게 흠집이 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 감독은 "서호철이 상무에서 1할을 치고 있었다면 이런 얘기가 나올 일도 없었을 거다. 성적이 좋고 타격 1위를 했으니 이렇게 이름이 오르내리게 된 것"이라고 감싸면서 "이번 일로 '서호철'이라는 이름 석 자는 확실히 알린 것 같다. 스스로 잘해서 이룬 성과이니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고, 기죽거나 상처받지도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또 "어차피 팀에 돌아올 우리 선수니까 잘해서 좋다. 복귀 후 모습이 기대된다"며 힘을 실어줬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