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외’에서 부는 바람 막아달라고?
▲ 지난 3월11일 열린 SK(주) 주주총회에 사외이사로 참석한 조순 전 부총리.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사외이사 제도는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위해 지난 98년 도입된 제도. 증권거래법상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의 유가증권시장 및 코스닥 상장업체는 이사회의 과반수, 최소 3인 이상의 사외이사를 둬야 한다. 자산총액 2조원 미만은 이사회 정원의 4분의 1 또는 최소 1인 이상이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애초 각계 전문가를 사외이사로 영입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최근 대기업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법무, 세무, 금융 전문가, 관료 출신 저명인사 영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점이다. 세금이나 각종 인허가 등 기업들의 이해가 직접적으로 걸린 대관업무에 밝은 인사들 위주로 사외이사 영입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올해부터는 눈에 띄게 법조인들의 영입이 늘고 있다. 올해부터 자산총액 2조원 이상의 기업들을 대상으로 증권집단소송제가 실시되는 것과 이런 흐름을 무관하다고 볼 수만 없다.
국내 최대 재벌 삼성그룹은 14개 상장사 중 13개 업체가 변호사나 세무·금융 전문가들을 사외이사로 두고 있어 이런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7명의 사외이사 중 이갑현 전 한국외환은행장(62), 임성락 전 한국장기신용은행 상무이사(60), 정귀호 전 대법관(66), 황재성 전 서울지방국세청장(61), 프란츠 힐링거 란데스방크 동경사무소장(55) 5명이 법무, 세무, 금융 전문가다. 2명만이 반도체 및 전자 기술자 출신이다. 삼성전자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삼성계열사들은 법무, 세무, 금융계 출신이 사외이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법조계 인물로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고중석 변호사(68)는 삼성중공업에, 서울행정법원과 서울지방법원의 부장판사를 지낸 백윤기 변호사(50·법무법인 두우)는 삼성물산, 송정호 전 법무부 장관(63)은 삼성전기, 서울지방법원 부장판사와 서울고등법원 판사를 지낸 장준철 변호사(57)는 삼성SDI, 이종욱 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59)는 제일모직, 부산지검 검사장 및 대구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지낸 김영철 변호사(59)는 삼성화재의 사외이사로 선임되어 있다. 여기에 최근 검사 출신이 보강된 삼성그룹 법무팀까지 가세하면 삼성의 법조 인맥은 가히 국내 최대·최강의 로펌 수준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관계 출신으로 강병호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59), 남궁훈 전 예금보험공사 사장(58), 김시형 전 한국산업은행 총재(66)는 삼성전기에, 대통령 비서실 재정경제비서관 출신의 이윤재씨(55)와 역시 대통령 비서실 사정비서관 출신의 이제홍씨(58) 그리고 최연종 전 한국은행 부총재(68)는 삼성화재에서 일하고 있다.
삼성은 법조 인맥 못지않게 사외이사를 통한 고위직 세무관료 확보에도 성공했다.
박석환 전 중부지방국세청장(57)은 삼성중공업, 순천세무서장과 인천세무서장을 지낸 박인주씨(61)는 삼성엔지니어링에, 서상주 전 대구지방국세청장(62)은 삼성물산에, 윤영대 전 공정거래위원회 부위원장(59)과 최병윤 전 대구지방국세청장(67)은 삼성SDI에 포진하고 있다.
제일기획, 제일모직, 에스원도 2명씩의 사외이사 중 1명을 공정거래위 상임위원, 서울고법 부장판사, 관세청장 출신을 선임하고 있다. 유일하게 호텔신라의 사외이사 2명은 모두 호텔경영자 출신이다.
LG그룹의 계열사는 금융계와 관계, 학계에서 고루 사외이사를 뽑은 편이다. 특이하게도(?) 검찰, 법원 출신 인사를 뽑지 않아 삼성과 대조를 보인다. 일각에서는 동종의 업체인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이사보수한도가 6백억원과 45억원으로 13배가량 차이가 나는 것을 빗대 삼성이 거액의 몸값으로 저명인사들을 싹쓸이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LG전자의 경우 진념 전 부총리(65)와 김일섭 삼일회계법인 대표(59), 강석진 전 GE코리아 대표(66), 홍성원 현 G모바일 대표를 사외이사로 두고 있다. (주)LG는 옛 럭키 부사장과 하나증권 회장을 지낸 구자정 신창개발 고문(65), 김진현 전 과학기술처 장관(69), 김용진 전 재무부 장관(66), 신영수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58)가 사외이사다.
▲ 대기업들이 한국 사회의 ‘파워맨’들을 사외이사로 끌어들이고 있다. 왼쪽부터 삼성전기 사외이사인 송정호 전 법무부 장관, LG전자 사외이사인 진념 전 부총리, 금호타이어 사외이사인 박상배 전 산업은행 부총재. | ||
불법 대선자금 수사와 소버린의 경영권공격을 겪은 SK그룹은 사외이사 제도를 적극 활용해 투명경영 확보에 나서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10명의 이사 중 7명을 사외이사로 둔 SK(주)의 경우 이사회백서를 발간해 이사회의 전문성과 투명성을 알리고 있다. 조순 전 부총리(77)를 비롯, 한영석 전 대검 중수부장(67), 오세종 전 한국장기신용은행장(62), 김태유 정부에너지자원 대사(54), 서윤석 현 이화여대 경영대학장(50)이 SK의 사외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법조계 인사로는 앞서의 한영석 전 대검 중수부장 외에 SK케미칼의 강보현 전 서울고법 판사(53), SK텔레콤의 윤재승 대웅제약 사장(43·검사 출신)이 있다.
정부부처 출신은 새로 선임된 SK텔레콤의 양승택 전 정보통신부 장관(66), SK케미칼의 이우석 전 산업자원부 과장(48), SK네트웍스의 윤기학 전 한국수출입은행 이사(60), 지계식 전 동력자원부 석유가스국장(69) 등이다. SK그룹의 경우에는 세무 관련 사외이사가 눈에 띄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들은 세무·회계 전문가를 1인씩 포함시키고 있다. 현대자동차는 박병일 전 마포세무서장(67)을 비롯해 김광년 전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66), 미아모토 마사오 전 미쓰비시 자동차 본부장(62), 김동기 고려대 경영대학원장(71) 4명이 사외이사다. 김광년 이사는 현대 하이스코의 사외이사도 맡고 있다.
기아자동차에는 김종창 전 서울지방국세청장(70)이, 현대모비스에는 우창록 전 조세연구원 자문위원(57)과 오성환 전 공정거래위원회 상임위원(58)이, 현대하이스코에는 최병일 청운회계법인 대표(65)가 각각 사외이사를 맡고 있다.
한편 올해에는 증권집단소송제를 앞두고 정·관계 및 법조계 유력인사들의 사외이사 진출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승수 전 경제부총리이자 주미대사(69)는 한국신용정보로, 황병기 전 감사원 사무총장(56)은 금강고려화학과 LG투자증권으로, 박상배 전 산업은행 부총재(60)는 금호타이어로 각각 진출했다.
사외이사의 역할과 지위가 경영투명성뿐만 아니라 기업의 대외 인맥을 관리하는 것으로 확대되는 최근의 경향대로라면 내년에 임기가 만료되는 사외이사들의 뒤를 이어 법조계 및 정·관계 유력인사들의 진출은 더욱 두드러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