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국 초반 실리 취한 후 신진서 공격 절묘한 타개…LG배·쏘팔코사놀배 등 결승 6연패 악연 끊어
3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열린 2021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3번기 최종 3국에서 박정환 9단이 신진서 9단에게 166수 만에 백 불계승을 거두고 종합전적 2-1로 우승했다. 박정환의 삼성화재배 우승은 이번이 처음이며 지난 2015년부터 2020년까지 6년 연속 중국 기사가 우승했던 기록도 마감됐다.
박정환의 우승은 뜻밖으로 받아들여진다. 신진서와 박정환의 결승전 동반진출로 활짝 웃은 바둑계였지만 결승전에 대한 전망은 일방적으로 신진서 쪽에 기울어 있었다. 당연했다. 지난해와 올해 2년간 박정환은 신진서에게 처참할 정도로 당했다.
2020년 LG배 결승에서 0-2(2월) 완패를 시작으로 쏘팔코사놀배 결승에서 0-3(6월) 완봉패, 용성전 결승에서 0-2(7월)로 또 완패했다. 그리고 10월과 12월 사이 열렸던 남해 슈퍼매치 7번기에서 0-7로 완전히 무너지면서 번기(番棋)승부 14연패라는 치욕스런 수모를 당했다. 상황은 올해 들어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지난 7월 쏘팔코사놀배에서 다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설욕하지 못했다. 9월의 용성전 결승에서도 승자는 신진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결승1국도 신진서의 손쉬운 승리로 마감되면서 ‘이번에도 역시…’라는 탄식이 대국장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박정환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2국에서 단 한 번도 리드를 허용하지 않고 완벽하게 국면을 마무리하더니 최종국에서도 초반 연구된 포석에서 앞서가기 시작한 이후 일방적으로 신진서를 밀어붙였다.
이번 승부에선 특히 신진서가 지난해부터 이어오던 세계대회 전승 행진을 박정환이 중단시킨 것이 눈에 띈다. 신진서는 지난해 11월 24일 22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중국 탕웨이싱 9단에게 승리한 이후 이번 삼성화재배 결승1국까지 17연승 중이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박정환의 우승 비결을 달라진 정신력에서 찾는다. 한 바둑 관계자는 이렇게 분석했다.
“박정환 9단은 동료 기사들 사이에 ‘무결점’이란 소리를 듣는다. 거의 완벽하다는 뜻이지만 반대로 풀이하면 뚜렷한 강점이 없다는 뜻도 된다. 그동안 신진서와의 대결에서 번번이 전투에서 밀렸다. 신진서의 우악스런 힘에 정면으로 맞대응하기보단 일단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자세를 취했는데 전투에 밀린 피해가 커서 후반엔 거의 기회가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2국과 3국에선 초반 실리를 취한 후, 신진서의 공격을 절묘한 타개로 막았다. 박정환 9단이 신진서 9단을 공략하는 해법을 찾은 것 같다.”
반면 신진서 9단에 대해서는 아쉽다는 평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한 동료 기사는 “신진서 9단이 현 세계랭킹 1위라는 것은 중국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같은 기사의 입장에서 바라봐도 정말 강하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그러나 멘탈 관리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잘 둘 때는 정말 강하지만 예기치 못한 패배를 당한 직후 추스르는 방법은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작년 커제 9단과의 삼성화재배 결승에서도 1국을 ‘마우스패드 미스’ 사건으로 허무하게 내준 후 2국도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였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전날 연승 흐름이 끊겼어도 빨리 냉정을 되찾아 3국에 임했어야 하는데 초반부터 서두르다 불과 50수 언저리에서 회복불능 국면을 만든 것은 좀 더 경험을 쌓아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1996년 창설 이래 26회째를 맞은 2021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의 우승상금은 3억 원, 준우승 1억 원. 나라별 우승 횟수는 한국 13회, 중국 11회, 일본 2회다.
[인터뷰] 박정환 “신진서가 내 약점 드러나게 했고, 나를 성장하게 했다”
박정환 9단이 고대하던 삼성화재배 첫 우승을 일궈냈다. 자신에게 무려 여섯 번의 좌절을 안겨준 후배 신진서 9단을 딛고 이뤄낸 성과여서 더욱 값지다.
삼성화재배 우승은 2006년 첫 출전 이후 16년 만이고 세계대회 우승은 다섯 번째, 프로 통산 우승 횟수는 32회를 기록하게 됐다. 삼성화재배의 새 챔피언 박정환 9단의 소감을 들어봤다.
—오랜만의 세계대회 우승이다. 소감은.
“삼성화재배에서 중국이 계속 강세였다. 성적을 내고 싶었지만 그동안 잘 안 됐다. 그래서 무엇보다 한국 선수끼리 결승이 성사된 것이 좋았다. 작년부터 정체기라 생각했다. 신진서 9단에게 계속 패하면서 내 바둑의 문제점을 잘 알게 됐다. 내 바둑이 어디가 약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신진서 9단이 드러나게 했고 그것이 나를 성장하게 하는 기회가 됐다.”
—쏘팔코사놀배, 용성전, 남해 슈퍼매치 7번기까지 신진서 9단에게 14연패를 당했는데 당시 심정은 어땠나.
“최근 세계대회에서 한국 기사들의 성적이 좋아진 것은 장고(長考) 기전이 늘고 그 실전 기회가 늘어난 덕분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기전들은 큰 도움이 됐다. 작년과 올해 신진서 9단에게 정말 많이 졌는데 그중 남해 7번기에서 7-0으로 졌을 땐 정말 힘들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7번기가 내가 성장한 계기가 된 것도 같다.”
—어떤 점이 부족했고, 또 성장했다고 할 수 있을까.
“신진서 9단과 대국하고 있으면 다른 기사와의 대국 때보다 내 약점이 잘 드러난다. 실수하면 용서 없이 바로 치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실력적으로 신진서 9단이 워낙 강해서일 것이다.”
—최종 3국의 전략은 어땠나.
“신진서 9단이 1국에서 썼던 포석을 다시 들고 나왔는데 사실 그 부분은 나도 연구가 꽤 되어 있었기에 승리의 요인이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경우가 드문데 운이 많이 따랐다. 삼성화재배가 32강전부터 결승까지 한 번에 진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결과적으로 이것도 내겐 좋았다. 체력은 자신 있어서다. 평소에 체력 관리에 신경을 쓰고 있어서 체력 부담은 없다.”
—마지막에 대마가 몰렸는데 당시 심정은.
“사실 그렇게까지 안 버텨도 될 것 같았지만 또 느슨하게 처리하면 엄청나게 추격을 당할 것 같아서 버텼다. 마침 시간이 많이 남아있었기에 살 자신은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면 알기 쉽게 살아두었을 것이다.”
—곧 있을 LG배 8강전에서 라이벌 커제 9단을 만난다.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힘든 승부가 될 것이지만 이번 결승전이 그 대국을 대비한 큰 공부였다고 생각한다. 오늘까지만 쉬고 내일부터 잘 준비하겠다.”
중국 4강전 전원 탈락은 세계바둑 주도권 교체 신호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삼성화재배 6연패를 달성하는 등 최근 세계무대를 주름잡던 중국은 출전선수 전원이 4강전에서 탈락하자 충격에 빠진 모습이다.
8강에 한국 5명 중국 3명, 4강에 한국 2명 중국 2명 등 팽팽한 균형을 이뤘지만 믿었던 에이스 커제는 32강 첫 판에서 김지석에게, 양딩신은 4강에서 신진서의 벽을 넘지 못했다.
특히 신진서와 박정환은 이번 대회에서 판팅위, 양딩신, 미위팅, 롄샤오, 자오천위 등 중국을 대표하는 강자들을 잇달아 꺾어 세계바둑 주도권이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왔음을 실력으로 입증했다.
중국은 올해 초 열린 LG배 결승전에서 커제 9단이 신민준 9단에게 패해 준우승을 그친 것을 시작으로 농심배에선 신진서 9단에게 5연승을 허용, 우승컵을 한국에 넘겨줬으며 최근 열린 춘란배 결승에서도 신진서 9단이 탕웨이싱 9단에게 2-0으로 승리를 거두는 등 각종 기전에서 한국 기사들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에 중국 바둑팬들은 4강전이 끝난 후 자국 게시판에 “4강에서 자오천위와 양딩신이 박정환과 신진서를 상대로 유리한 바둑을 지키지 못하고 마지막에 역전당한 것은 끝내기 실력보다는 한국 기사들에게 이기고자 하는 투지와 정신력에서 뒤진 결과”라고 질타하면서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한국이 정상적으로 세계대회를 진행하고 있는 반면, 중국은 코로나19를 핑계로 단 하나의 세계대회도 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중국이 어찌 기사들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겠는가”라며 자국의 바둑 행정을 비판했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