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실리콘 음극재·두산 SOFC 지주사가 교통정리…현대차는 전기차 시대 앞두고 계열사들 ‘운신의 폭’ 허용
계열사 간 내부 경쟁에 비교적 느슨한 그룹도 있다. 어느 쪽이 잘될지 모르니 일단 지켜본다는 것이지만 중복 투자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올 경우 책임 소재를 두고 논란이 불거질 수 있고, 좋은 결과가 나와도 결국에는 교통정리를 피할 수 없다.
#SKC 이어 두산퓨얼셀도 신사업 제동
최근 재계에서 회자되는 대표적인 중복 투자 논란은 SKC의 실리콘 음극재 투자 건이다. SKC 이사회는 지난 9월 29일 영국의 실리콘 음극재 스타트업 넥세온과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안을 승인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지주회사인 SK(주) 소속 이사회 멤버들이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부결됐다. SKC는 결국 컨소시엄을 구성해 넥세온에 386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SKC 측은 이전 이사회는 사업 구조와 사업 진입 시기에 이사들 이견이 있어서 부결된 것이고, 이번 투자는 추후 음극재 사업 진출 및 합작법인 설립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사업이 지주회사로 인해 좌절됐다는 해석이 나오면서 주가도 신통치 못하다. SKC의 주가는 9월 29일 한때 20만 원을 넘겼지만 이후 15만 원대까지 하락했다가 최근 17만 원대에 겨우 안착하는 흐름이다.
당초 SKC가 음극재 사업에 나선 이유는 시너지 효과 때문이다. 실리콘 음극재는 기존 흑연(탄소) 음극재 대비 배터리 용량을 크게 늘릴 수 있고, 충전 속도도 훨씬 빠른 차세대 소재다. 또 SKC는 자회사 SK넥실리스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얇은 4마이크로미터(㎛) 두께의 초극박 동박을 양산하고 있어 이를 실리콘 음극재에 적용할 수 있다는 기대가 컸다.
문제는 SK그룹의 다른 계열사 SK머티리얼즈가 이미 실리콘 음극재 사업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SK머티리얼즈는 미국의 실리콘 음극재 특허 보유기업 그룹14테크놀로지스와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SK 측은 중복 투자 때문에 합작법인 설립을 부결시킨 것은 아니라고 해명하지만 결과적으로 SKC의 입지가 약해진 것은 사실이다. SK(주) 관계자는 “이사회에서 의사표현을 한 것에 대해 뭐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전했다.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강화하고 있는 두산그룹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두산그룹 계열사들이 충돌하는 지점은 3세대 수소연료전지로 꼽히는 고체산화물연료전지(SOFC) 개발이다. 2020년 9월, 두산퓨얼셀은 2023년 말까지 발전용 SOFC 셀·스택 제조라인과 SOFC 시스템 조립라인 구축에 724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공시했다. 또 영국 세레스파워와 SOFC 개발을 위한 기술협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두산그룹은 최근 설립한 두산에이치투이노베이션이 두산퓨얼셀아메리카의 인산형연료전지 핵심기술을 활용해 SOFC 개발을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산퓨얼셀아메리카는 두산퓨얼셀이 아니고, 지주회사인 (주)두산의 자회사다. 이 때문에 두산퓨얼셀이 SOFC 개발의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시스템 개발에 대한 연구개발(R&D)을 두산퓨얼셀아메리카가 담당하면서 향후 두산퓨얼셀은 일정 금액을 로열티로 지불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시장이 개화하기 전에 지주회사와 수익성을 분배하는 구조가 생성된 것은 성장성에 대한 우려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두산그룹 관계자는 “수소 관련 기술 개발 연구진들이 여러 계열사에 분산돼 있어서 두산에이치투이노베이션으로 일원화한 것”이라며 “R&D를 두산에이치투이노베이션에서 하고, SOFC를 개발하면 제품의 생산과 판매는 두산퓨얼셀에서 담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대두산인프라코어(옛 두산인프라코어) 인수를 계기로 계열사 사업구조를 개편한 현대건설기계에도 비슷한 논란이 있었다. 현대건설기계는 유압기기 및 양산부품 사업을 최근 신설된 중간 지주회사 현대제뉴인에 넘겼다. 현재 부품 사업이 큰 이익을 내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성에 대한 기대는 크다.
한영수 삼성증권 연구원은 “현대건설기계 부품 사업은 현대두산인프라코어 인수로 인해 신규 매출처가 커지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다”며 “부품 사업을 현대제뉴인에 넘기면서 투자심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현대건설기계 측은 사업부 양도 목적에 대해 “사업재편을 통한 경영 효율성 증대”라고 설명했다.
#"산업 간 영역 구분이 어려워서…"
지주회사가 신사업에 개입할 때마다 계열사 직원들의 반발이 이어진다. 한 대기업 계열사 직원은 “이미 수년 전부터 관련 사업 진출을 보고해왔고, 그때는 별 얘기 없다가 갑자기 제동이 걸릴 때가 많다”며 “보고서 몇 개 읽은 수준의 실력으로 한 기업의 새로운 먹거리를 좌초시키는 것이 맞는지 싶다”고 비판했다.
지주회사도 곤혹스럽다는 입장이다. 한 그룹의 컨트롤타워 관계자는 “과거에는 산업 간 장벽이 확실했고 영역 구분 또한 어렵지 않았다”면서도 “지금은 신사업이라고 해도 성패 가능성을 미리 예상할 수 없고, 심지어는 기존 산업과 어디서 어떻게 충돌할지도 알 수 없다”고 털어놨다.
재계에서는 계열사의 자율경영을 최대한 용인하는 그룹으로 현대자동차그룹과 SK그룹을 꼽는다. SK그룹은 최근 실리콘 음극재 충돌 이슈가 불거졌지만 재계 관계자들은 워낙 많은 기업이 공격적으로 나서다 보니 어느 정도는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현대차그룹 역시 현대자동차와 기아 간 내부 경쟁에 익숙해져 있고, 전기차 시대를 맞아 내연기관 중심 기업들이 새로운 먹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을 허용한다고 분석한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차 연구개발 조직과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현대트랜시스 등이 독자적으로 전기차 모터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현대차그룹 일부 계열사는 내연기관 시대가 끝나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처지”라며 “계열사 간 충돌은 숙명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민영훈 언론인
박형민 기자 god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