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 구형을 받은 어떤 피고인은 순간 정신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검사는 자기의 칼을 받는 상대방의 입장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았다. 토론회의 다른 검사 출신 대통령 후보는 미루어지고 있는 사형집행을 하겠다고 했다. 흉악범을 청소하려는 사이다 같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너무 단순하게 일면만을 얘기하는 것 같았다. 영혼이 깨끗하게 변한 참회한 사형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검사 출신 후보는 여당 대통령 후보가 변호사 시절 조폭을 변호했던 저질이라고 비난했다. 그 말에 다른 검사 출신 후보가 변호사란 돈만 받으면 뭐든 하는 총잡이 같은 존재라고 거들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과연 그들의 인식이 바른 것인지 의문이었다. 그들의 잠재의식 속에는 사람과 죄인의 두 종류만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법조인인 나도 역시 그런 시각을 공유했었다. 20대 중반쯤 서울지역 군사법원에서 판사를 했었다. 한번 재판을 할 때마다 100명 가까운 사람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수학 공식 같은 기준이 있었다. 그 기준을 정확히 지키는 것을 공정으로 알았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에 반성하고 후회했다. 사람마다 환경과 삶의 질감과 죄의 구덩이로 빠진 원인이 달랐다. 인문학적 소양이나 경험 없이 재판 기계가 되었던 나는 공감능력이 없었다. 그들의 절규를 들을 귀가 없었다.
검찰청에서 몇 달간 검사 직무대리로 근무하던 때였다. 어느 날 우연히 고교 선배인 변호사가 찾아와 그가 맡은 의뢰인의 사정을 말했다. 그 선배는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법대 재학 시절 분신한 전태일 주변을 살피고 그 평전을 쓴 사람이었다. 그는 민주화 투쟁으로 오랫동안 수배를 받았었다. 그리고 뒤늦게 인권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나는 사건처리 기준을 말해주면서 봐주기 곤란하다고 했다. 그 얼마 후 법정에서 나오는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나를 끌고 화단 옆 벤치에 앉히더니 이런 말을 해 주었다.
“너 아침마다 피의자들이 수갑을 차고 포승에 묶인 채 검사실의 네 책상 앞에 오지? 그 수갑과 포승을 풀어주고 자판기 커피 한잔 권한 적이 있나?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이 되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그의 말이 몽둥이가 되어 나의 뒤통수를 때리는 것 같았다. 포승에 묶여 오는 죄수들은 나의 눈에 사람이 아니었다. 치워야 할 사회의 쓰레기였다. 그 선배는 그런 나의 시각을 바꾸어 주었다. 일찍 죽은 그 선배는 법조계의 큰 별이 되어 지금도 많은 후배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변호사에 대한 나의 인식을 바꾼 계기가 있었다. 감옥에서 만난 징역을 오래 산 절도범 때문이었다. 그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변호사 윤리규정 제1조를 보면 변호사는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되어 있는데 변호사가 추구해야 한다는 그 사회정의라는 게 뭐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변호사는 고용된 양심이고 자본주의의 첨병이란 비난이 있었다. 도둑이자 거짓말을 해주는 나쁜 놈이란 소리도 들었다. 윤리규정의 사회정의는 장식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을 계속했다.
“뱀 같은 취급을 받는 우리 죄인은 세상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어요. 이미 인간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변호사는 그게 아니죠. 양같이 정직한 지성인입니다. 뱀이 물을 먹으면 독이 되고 양이 물을 먹으면 좋은 젖이 됩니다. 뱀 같은 우리들에게서 나오는 말은 세상이 독으로 취급해도 양 같은 변호사가 하는 정직한 진실의 말은 믿어줄 수 있으니까요. 저는 그게 변호사의 존재이유고 사회정의라고 생각해요.”
나는 그에게서 변호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대통령 후보들의 세상에 대한 인식은 너무 메마르고 가벼웠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국이 없는 밥만 먹는 것 같은 팍팍함을 느꼈다. 그들이 좀 더 촉촉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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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