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서 넘긴 반도체 저울질 ‘떵떵’
청년실업자의 사연처럼 들리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주)하이닉스반도체(하이닉스)다. 하이닉스는 지난 2001년 10월에 채권금융기관 공동관리 절차에 들어간 이후 3년 반 만인 올 여름 이전에 워크아웃을 조기졸업할 예정이다. 당초 계획했던 2006년 12월31일보다 1년 반 이상 앞당길 정도로 놀라운 성과인 것이다. 문제는 하이닉스를 인수할 만한 업체가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업계에서는 벌써부터 하이닉스의 인수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그렇지만 거론된 당사자들은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지난 4월13일 하이닉스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조기졸업을 위한 채권단 설명회에서는 자금조달방식에서 서로 이견을 보이던 산업은행과 외환은행이 절충을 통해 합의에 도달함으로써 워크아웃 조기졸업이 사실상 확정됐다.
하이닉스는 2006년 12월 말에 도래하는 기존 차입금 상환을 위해 1조5천억원의 채무 중 1조원 이상을 차입할 경우 최종적으로 워크아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날 채권단은 기존의 1조5천억원의 채무를 갚고 사업운영자금으로 활용할 5천억원을 포함한 2조원을 리파이낸싱(refinancing: 기존 빚을 갚은 뒤 다시 차입하는 방식)하기로 결의했다. 이 중 1조2천5백억원은 국내에서 조달하되 나머지 7천5백억원은 해외에서 무담보 대출로 차입해 조달할 예정이다.
현재로서는 이런 하이닉스의 자금 조달 방안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대체로 호의적이다.
이는 지난해 하이닉스가 6조9백70억원의 매출에 영업이익 2조2백40억원, 순이익 1조7천2백30억원이라는 성과를 낸 데다 최근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에서 하이닉스의 신용등급을 상향조정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하고 있다.
워크아웃 조기졸업이 확정되면 기존의 채권단 대신 ‘출자전환주식공동관리협의회’가 설치되어 지분매각을 진행하게 된다. 채권단이 가지고 있는 하이닉스의 지분 81% 가운데 30%는 올 하반기 국내외 장기투자가에 우선 매각키로 방침을 정했다. 나머지 51%는 2007년 12월 이후 매각할 수 있다는 단서가 달려 있지만 인수인이 나타날 경우 그 이전에라도 공동매각이 허용돼 사실상 하이닉스에 대한 인수합병(M&A)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하이닉스 매각이라는 또 하나의 산을 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이 남아 있다. 우선 하이닉스를 인수할 만한 자금 여력이 있는 업체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5조6천억원 수준으로 지분 51%는 2조9천억원에 이른다. 업계에서는 하이닉스를 인수자 후보로 삼성전자, LG전자, 동부아남반도체를 꼽고 있다. 채권단으로서는 반도체 사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회사로 가능하면 국내업체이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거론된 당사자들은 하이닉스 인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로서는 이미 세계 최고의 반도체 사업을 펼쳐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하이닉스를 떠안을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채권단도 삼성은 크게 고려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지난해 12월 동부전자와 아남반도체가 합병한 동부아남반도체의 경우는 합병 당시의 협조융자 1조2천억원을 2010년까지 상환해야 하는 처지라 자금 여력이 없는 상태이다. 동부아남반도체측도 “하이닉스 인수는 검토조차 해본 일이 없으며 그럴 상황도 아니다”는 입장이다. 동부아남반도체는 현재 주문생산방식(파운드리)의 반도체 생산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어 당분간 이에 집중할 계획이다.
채권단과 증권가에서는 하이닉스를 인수할 가장 적합한 업체로 LG그룹을 꼽고 있다. 하이닉스의 전신이 LG반도체 인 데다가 당시 경영진의 의지와 상관 없이 정치권에서 기업간 빅딜(구조조정)을 통해 현대전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현대전자는 이후 2001년 부실로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 반도체 사업을 남기고 대부분을 매각했다.
빅딜 당시 LG측은 전자 및 통신 사업에 필요한 반도체 부분을 잃게 되어 아쉬움이 컸다는 후문이다. 지금 LG가 하이닉스를 인수한다면 실패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DJ정부의 빅딜의 오류를 바로잡는 ‘역빅딜’이 되는 셈이다. LG 내부에서도 반도체 사업의 부재가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낳은 원인으로 분석하는 시각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LG는 “하이닉스의 인수는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전자 및 통신사업에 필요한 것은 비메모리 부분인데 하이닉스는 이미 비메모리 분야를 매각하고 현재는 메모리 생산에만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LG의 한 관계자는 “반도체 사업의 경우 선두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1위 업체가 아닌데 굳이 인수할 이유가 없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한편 증권가 일각에서는 LG의 자금여력이 부족할 경우 사모펀드(PEF)를 만들어 자금을 조달하고 LG는 일부 인수 후 경영권을 가지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한때 업계에서는 이 때문에 LG가 하이닉스를 인수할 것으로 점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LG가 이를 강하게 부정하자 이 방안을 처음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 대우증권측은 “임원 한 분이 기자들과 식사 도중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 것이 기사화된 것이다. 하이닉스에 대해서는 무수한 방안들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일 뿐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해프닝이었다는 해명이다.
이렇게 타의에 의해 LG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채권단이 국내업체를 선호하는 것과 관련 있다. 해외업체의 경우 기업실사를 빌미로 첨단기술만 빼가고 매각을 포기하는 경우가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하이닉스가 중국 업체로 넘어갈 것으로 보는 것이 중론이다. 그러나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의 관계자는 “중국 업체는 아니다”는 언급 이외에는 말을 아꼈다.
현재까지는 상황으로는 LG의 하이닉스 인수설은 이를 바라는 금융, 증권계의 바람으로 인해 부각된 측면이 크다. 그러나 하이닉스 채권단이 더 상세한 인수방안을 제시할 경우 LG가 나설지는 아직 미지수로 남아 있다.
한편 당사자인 하이닉스측은 “현재로서는 어떤 입장을 거론할 상황이 못 된다. 우리는 그저 채권단이 하는 대로 지켜볼 뿐 말할 입장이 아니다”는 입장이다. 하이닉스는 지난 4월28일 중국 공장의 기공식을 가지는 등 중국 진출을 본격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