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인사·백담사 스님 등 방문, 정·재계 인사 발길 뜸해…밖에선 전씨 규탄집회 ‘시끌’
11월 23일 오전 8시 45분쯤 대한민국 11‧12대 대통령을 역임한 전두환 씨가 사망했다. 전 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 연희동 자택은 오전 11시부터 취재진으로 북적거렸다. 11시 10분이 가까운 시각 과학수사대가 자택에 도착했다. 하얀색 작업복을 갖춰 입은 과학수사대 약 20명과 검안의가 자택으로 들어섰다. 현장 검증 뒤 범죄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으면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될 예정이었으나 병원에서 코로나19 환자가 발생한 탓에 사망 6시간이 지난 오후 2시 52분이 돼서야 자택을 출발했다.
전 씨의 시신을 실은 운구차는 오후 3시 10분쯤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취재 열기를 의식한 듯 장례식장 정문 옆에 위치한 주차장 입구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진입해 앞에서 기다리던 취재진 수십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뜀박질을 하는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민정기 전 청와대 비서관 등 전 씨 최측근 인사들은 유족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해 빈소를 마련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빈소는 오후 4시 30분쯤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가장 큰 지하 2층 특실 1호실에 마련됐다. 이때부터 입구에는 정장을 입은 관계자들이 취재진의 동선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빈소 입구에 마련된 방명록에는 ‘부의금은 정중히 사양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정식으로 조문이 시작된 시각은 오후 5시였다. 그러나 몰려든 취재진에 비해 빈소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빈소 입구 맞은편에 위치한 에스컬레이터 인근 통로에는 수십 명의 취재진이 모여 앉아있었지만 오후 5시가 지나도 지하 2층으로 내려오는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10월 26일 사망한 노태우 씨의 장례식에 여야 정치인과 재계 인사가 줄지어 조문했던 모습과는 상이했다.
한산한 빈소에는 정‧재계의 조화 행렬만 이어질 뿐이었다. 오후 5시쯤에는 강창희 전 국회의장의 조화가, 5시 6분쯤에는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의 조화가 각각 빈소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5시 23분쯤 장례식장 관계자가 전직 국회의원 모임인 헌정회의 김일윤 회장이 보낸 조화를 어깨에 이고 빠르게 빈소 내부로 들어갔다. 5시 44분쯤에는 또 다른 직원이 반기문 전 유엔총장의 2단짜리 조화가 올라간 손수레를 끌고 등장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빈소 안쪽에 노태우 씨 부인 김옥숙 씨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조화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실제로 발걸음을 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취재진은 조문객 대신 빈소로 향하는 화환에 적힌 이름을 확인하기 위해 빈소 입구까지 모였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다만, 과거 전 씨와 연을 맺었던 하나회와 5공 인사들은 일찍부터 빈소를 찾았다. 공식 조문 시간보다 25분이나 앞서 4시 35분쯤 도착한 이영일 전 의원은 기자들에게 “총재 시절 비서실장이었다. 소식을 듣고 놀랐다”고 말했다. 뒤이어 37분쯤에는 하나회 출신 고명승 전 육군대장이 등장했다. 하나회는 전 씨가 조직한 군 내 사조직으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주역이다. 특히 고 전 육군대장은 조문 후 빈소를 나오자마자 ‘5·18 유족에 사과할 생각 없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다시 빈소로 돌아가야만 했다.
5공 시절 2인자로 불렸던 장세동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은 연희동 자택에서부터 가장 오랜 시간 빈소를 지킨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조문을 마치고 나온 장 전 부장은 ‘안에서 어떤 말을 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대신 일찍부터 빈소 주변을 돌아다니던 한 유튜버가 “(안에서) 좋은 말씀 주셨다” “어르신 조심히 가시라” “빨갱이 조심하시라” “멸공” 등을 외쳤다. 결국 보좌관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장 전 부장을 화장실 쪽으로 데려갔다. 감색 정장을 입고 등장한 하나회 출신의 정진태 전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조문 후 기자들과 만나 이런 말을 늘어놓았다.
“(5‧18 민주화운동은) 북한군이 300여 명이나 남하해서는 일으킨 사건 아니겠습니까. 만일 그걸 수습하지 못했다면 대한민국 역사가 어떻게 됐겠느냐….”
5시 18분쯤에는 강원도 인제 백담사의 도후 스님을 포함한 스님 3명이 빈소를 찾았다. 전 씨는 1988년 11월 23일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백담사에서 2년 동안 칩거한 바 있다. 도후 스님은 당시 백담사 주지였다. 10여 분이 흐른 30분쯤 빈소 내부에서 ‘탁탁탁탁’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염불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조문 후 기자들과 만나 “과거 2년 동안 같이 수행했던 인연으로 왕생극락하시라고 염불해 드렸다”고 말했다.
이들을 제외한 조문객 대부분은 전 씨의 친인척으로 보였으나 인터뷰를 거절했다. 오후 6시쯤 빈소를 찾은 한 노년의 부부는 ‘어떻게 오셨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친척이니까 왔다”면서도 구체적인 질문에는 고개를 숙이며 손을 내저었다. 그 뒤로 검은색 중절모를 갖춰 쓴 노년의 남성들이 빈소를 방문했으나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은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빠르게 올라갔다.
관계자와 친인척의 조문이 어느 정도 끝난 늦은 저녁에는 소란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 50대 여성은 조문을 마친 뒤 “(전 씨와) 인연은 없다”면서도 “진짜 보수가 분열한 것 같아 가슴이 아파 왔다”고 말했다. 오후 7시쯤에는 또 다른 중년 여성이 빈소 입구에서부터 시작해 지하 2층을 한 바퀴 돌면서 “전 전 대통령은 나라를 위해 애쓰셨다. 이준석은 물러나라”고 외치다가 끌려 나갔다. 한 남성 유튜버는 휴대전화를 이용해 빈소 내부를 지속적으로 찍으며 “여러분, 조문 많이 오셔도 된다” “밖에 나가면 빨갱이 한 놈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장례식장 건물 외부에서 1인 시위를 하던 한 시민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장례식장 밖에선 전 씨를 규탄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건물을 에워쌌다. 이날 오후 5시 30분쯤 장례식장 건물 외부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한 안 아무개 씨(19)는 ‘반성하지 않는 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적힌 스케치북을 들었다. 그는 “전 씨는 사자명예훼손 사건 재판이 열리는 동안에 광주에 내려오지도 않고, 광주시민에 사과할 기회를 줬음에도 스스로 걷어찼고 또 이렇게 사망했다”며 “전직 대통령이라는 책임을 산산조각 냈다”고 비판했다.
30분 뒤인 오후 6시쯤에는 시민단체 전두환심판국민행동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전 씨를 규탄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이어 잡은 8명은 갈라진 목소리로 “5·18 학살과 헌정유린, 삼청양민학살, 형제복지원과 군 강제징집 녹화 선도공작의 참담한 고문 및 인권유린과 탄압, 노동운동 탄압 등 5공화국에서 벌어진 국가폭력의 만행에 대해 단 한마디의 사죄도 없이 떠났다”며 “전 씨와 그 부역세력들은 지금이라도 국민과 역사 앞에 뉘우치고 참회하고 사죄하라”고 외쳤다.
한편, 전 씨의 장례는 11월 27일까지 5일장으로 치러진다. 입관은 11월 25일 오전 10시이며 발인은 27일 오후 8시다. 장지는 미정이다. 민 전 청와대 공보비서관은 23일 기자들과 만나 “셋째 아들인 재만 씨가 24일 저녁이 돼야 귀국한다고 한다”며 “아들이 귀국하자마자 발인할 수는 없지 않나”고 5일장을 치르는 이유를 설명했다. ‘장지는 어디냐’는 질문에는 “상주회에서 결정할 일”이라고 답했다.
조문은 이날 밤 10시까지 이어졌으며 빈소 관계자에 따르면 5시간 동안 빈소를 찾은 조문객은 300여 명이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