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영 체제에서 정의선 체제로 ‘쏙’…자동차금융 전문 계열사 역할 강조 전망
기아는 지난 12월 9일 현대캐피탈 주주인 엘리시스제육차, 제이스씨제삼차 등 특수목적법인(SPC)으로부터 같은 달 20일 각각 9.99%의 지분을 8723억 원에 취득한다고 공시했다. 이로써 기아는 기존 현대캐피탈 지분을 20.1%에서 40.1%로 늘리게 된다. 현대차가 가진 지분 59.7%와 합하면 현대차그룹의 지분이 99.8%로 높아진다. 현대캐피탈은 현대차그룹에 완전히 편입됐다.
이번 지분 정리는 현대차그룹의 금융계열사 지배구조 개편 작업과 맞물려 일어났다. 기존에는 정태영 부회장이 현대카드·현대커머셜과 함께 현대캐피탈 대표이사를 맡아왔으나 9월 30일 자로 현대캐피탈 대표이사와 사내이사직에서 물러났다. 정 부회장의 부인 정명이 현대커머셜 사장도 같은 날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브랜드 부문 대표이사 자리에서 사임했다. 지난 4월 선임된 목진원 현대캐피탈 대표이사가 단독 대표로 홀로 현대캐피탈 이끌고 있다. 임원들도 정리됐다. 지난 10월 현대캐피탈 내 현대카드를 겸직했던 임원들 전부 현대캐피탈 임원을 사임한 뒤 현대카드만 맡게 됐다.
이로써 금융계열사는 분리되는 수순이다. 현대차그룹 금융 자회사 3개를 이끌어 온 정태영 부회장은 현대카드와 현대커머셜만 가져가고, 현대캐피탈은 정의선 회장 체제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현대커머셜의 단일 최대 주주는 현대차(37.5%)지만 정태영·정명이 부부가 가진 지분은 총 37.5%로 동일하다. 정태영 부부는 현대커머셜을 통해 현대카드 지배력을 높였다. 현대카드 최대주주는 현대차(36.96%)고 현대커머셜과 기아차가 각각 24.5%, 11.5%씩 보유했지만, 올해 8월 현대커머셜은 재무적투자자들이 보유한 현대카드 지분 4%를 추가 인수했다. 정태영 부회장의 백기사로 꼽히는 푸본금융그룹도 지분 20%를 인수하며 지분 정리를 도왔다.
현대엔지니어링 IPO(기업공개·상장)는 금융계열사 정리에 불을 지필 전망이다. 정의선 회장은 현대엔지니어링 상장 시 보유 지분 11.7%를 팔고 현대모비스 지분을 사들이면서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이 작업이 이뤄지는 동안 정태영 부회장이 유상증자나 현대카드 IPO 시 지분을 흡수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현대커머셜의 지분율을 높여 금융계열사를 분리할 수 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지금 현대엔지니어링 상장이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일 것으로 보이며 그때 같이 금융계열사 분리가 일어나지 않겠느냐”며 “차 판매 시 할부나 리스를 활용하기 때문에 현대캐피탈은 현대차그룹 판매에 있어 없어선 안 되는 구조기에 현대차그룹에 남아있을 전망이다. 수입차들도 대부분 캐피탈을 수족처럼 함께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BMW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폭스바겐파이낸셜서비스코리아 등 수입차 업체들은 저마다 캐피털사를 운영하고 있다.
새로운 체제 아래 현대캐피탈은 금융사로서의 독립성보다는 현대차·기아를 지원하는 자회사적 성격이 짙어질 전망이다. 기존에도 그룹 차 판매와 관련된 매출 의존도는 높았다. 현대차와 기아의 전속금융사(캡티브사)로서 자동차할부 및 리스 금융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올해 3분기 기준 전체 영업수익 가운데 리스 수익(37.7%)과 할부금융 수익(17.7%) 등 자동차금융 관련 수익이 55.4%로 가장 많다. 이외 현대캐피탈의 자동차금융 이용 고객을 대상으로 개인신용대출과 주택담보대출을 판매한 데 따른 대출채권 수익은 22.13%다. 자산 현황을 봐도 자산총액 34조 9337억 원 가운데 13조 8926억 원(39.77%)이 자동차할부금융자산이고, 2조 3435억 원(7.61%)이 리스채권이다. 대출채권은 28.27%인 9조 8759억 원을 기록했다.
다만 오너 일가인 정태영 부회장이 현대캐피탈을 진두지휘할 당시 현대커머셜·카드와 묶여 일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다면 이젠 현대차·기아를 후방 지원하는 계열사로 전환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기존 카드나 커머셜과 가졌던 별도의 연계성은 크게 약화될 전망이다. 금융업 기반의 사업 다각화 시도는 힘들어지는 셈이다. 카드사들이 자동차금융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심화된 데 따라 대부분의 캐피털사들이 기업대출·지급결제·마이크로파이낸스(저소득층 대상 소액 대출) 등 비자동차 금융 강화로 독자적 영역을 구축하는 모습과는 다른 행보다.
서지용 상명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대차와 기아가 모빌리티 서비스 중심으로 사업을 재편하면서 소비자들이 자동차나 모빌리티 관련 서비스·제품을 구입할 경우 금융 지원을 하는 방식으로 역할이 본격적으로 바뀔 것”이라며 “현대차의 해외 진출 시 금융영업망을 구축하는 데 기여할 것이고 현대차 중고차 매매업에 진출할 경우에 중고차 금융사업도 현대캐피탈이 담당하는 등 신사업보다는 자동차금융에만 특화된 사업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 기아는 최근 현대캐피탈 주식 매입 이유에 대해 자동차 할부금융사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시너지를 키우기 위한 차원이라고 밝혔다. 차량 전동화와 커넥티비티, 차량공유·구독 서비스 등 다양한 모빌리티 산업과 결합하는 추세 속에서 기아 역시 자동차 금융 시장의 새로운 성장동력을 모색 중이라는 분석이다. 현대캐피탈은 기존부터 맡고 있던 차할부금융을 비롯해 앞으로 카셰어링, 자율주행, 중고차·친환경차 판매, 출장 세차·차량 정비 같은 연계 서비스 등 현대차그룹 모빌리티 사업 전반에 필요한 금융서비스를 전담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우려의 지점도 있다. 현대캐피탈이 현대차그룹에 완전히 예속되면서 자동차 업황 부진에 따른 리스크는 더 커질 전망이다. 자동차 사업이 호황기를 맞이할 때는 현대캐피탈 역시 호실적을 기록할 테지만, 반대의 경우 동반 부진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현대차그룹의 차 판매 실적은 현대캐피탈로 전이되는 상황이다. 올해 9월 말 현대캐피탈의 자동차할부금융 자산은 전년 동기보다 3.94% 줄어들었다. 차량용 반도체 수급에 차질을 빚으면서 국내외 판매 부진이 장기화했기 때문이다.
서지용 교수는 “주로 오토 금융 쪽으로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다양한 사업에 진출하는 데 있어서 제한되면서 결론적으로 캐피탈업계에서의 지위가 오히려 좀 더 축소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는 있을 수 있다”며 “사업 다각화를 통해 규모를 키우려는 경쟁업체에 비해서 현대캐피탈의 시장 지위가 약화하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물론 든든한 ‘배경’을 얻었다는 의견도 많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현대캐피탈은 현대차와 기아의 차량을 판매하기 위한 할부금융사로 설립된 회사기 때문에 일반 캐피탈업체들과는 모태가 다르다”며 “업계에서는 흔히 캐피탈 비즈니스는 ‘좋은 아빠’를 만나야 성장한다고 말하는데, 현대캐피탈은 현대차를 등에 업고 자동차 금융 상품도 팔고 해외도 진출하고 있다. 현대차만큼 좋은 아빠가 어디 있겠느냐”고 전했다.
이와 관련, 현대캐피탈 관계자는 “전세계 모든 주요 메이커 완성차들은 전속 할부금융사가 있고 우리와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다”면서 “현대차와 기아의 판매 실적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뜻은 아니다. 현대차 판매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 중으로 새로운 모빌리티 금융 서비스 개발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다른 측면에서는 기업금융 등 자동차 외의 부문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김예린 기자 yeap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