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내 작품 보호에 가려지는 ‘모티브’들…임의대로 쓰이지 않을 자유는 없나
창작자들이 외치는 표현과 창작의 자유는 실제 사건의 피해자나 관계자들을 임의대로 작품에 차용해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주장이라는 지적이 잦았다. 예컨대 실화를 소재로 작품을 만들면서 무고한 사건 피해자에게 극적 장치라는 이유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상상해 집어넣는 식이다. 피해자나 유족은 이 같은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가 작품이 공개된 이후에나 알게 되는 일이 있었다.
실제로 김윤석·주지훈 주연의 영화 '암수살인'(2018)은 작중 범인에게 살해당하는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의 유가족이 영화의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극 중 인물의 나이, 살해 수법, 발생 지역을 동일하게 차용해 유족들이 해당 사건임을 곧바로 인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제작 전 유가족에게 활용 동의를 얻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화의 메인 포스터에서도 '실화'임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정작 '실화'의 피해자들과 별도의 조율을 거치지 않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비판이 이어졌다. 이 사건은 제작사 측이 유가족을 찾아와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않은 점을 사과하고, 다른 유가족이 범죄 경각심을 제고한다는 영화 취지를 공감해 상영을 원한다는 점 등을 고려해 소를 제기한 유가족 측이 조건없이 취하하기로 결정했다.
1978년 부산에서 일어난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극비수사'(2015)도 같은 이유로 논란이 일었다. 영화 개봉 후 실제 사건에 대한 분석 기사 등이 이어지면서 이미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던 가족들에게 피해가 이어지면서다. 당시 납치 피해자의 가족은 "누구도 그 영화 제작에 동의해준 바가 없다. 사건 이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왜 이제 다시 그 악몽을 들춰내는지 모르겠다"며 제작진을 상대로 2차 가해 등에 대한 피해 배상을 요구하는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영화 '실미도'(2004) 역시 실미도 사건으로 희생된 민간인들을 사형수, 무기수, 범죄자로 묘사해 고인과 유족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희생자 유가족들의 영화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맞닥뜨렸다. 이 사건은 상고심까지 제작진의 손을 들어줬지만 당시 재판부는 '예술활동으로써 영화의 창작 자유를 인정하되, 그러한 자유가 무제한의 권리는 아니기 때문에 실재하는 인물이나 사건을 배경으로 한 예술작품이 공연히 허위 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하는 경우에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기존 판례를 전제했다.
이처럼 법적인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는 창작자들의 주장처럼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인정하는 사례가 대부분이기에 소송을 제기한다고 해서 피해자나 유족들에게 큰 실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종종 소 제기 소식이 전해지는 것은 '픽션을 픽션으로 보지 않는' 일부 대중들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실제 사건 또는 피해자 본인을 모티브로 했음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작품이 아무리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허구이며, 실존 인물과 겹치더라도 우연에 의한 것임을 알려드린다'는 문구를 띄워도 이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관객들이 나온다. 이 경우 피해는 온전히 실존 인물들이 받게 된다는 것을 우려해 소송으로 주위를 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실제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는 작품은 온전히 허구로만 이뤄진 작품에 비해 더 큰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미 배경과 주요 사건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굳이 '극적인 이벤트'를 고심해야 하는 어려움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쏟아부어야 할 노력은 실제 배경·사건과 실존인물에 대한 연구에 집중돼야 하지만, 최근 문제가 됐던 작품들은 이런 노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대중들에게 지적돼 왔다. '편한 길'을 가기 위해 모티브가 있는 작품을 택했다면 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이를 소홀히 했다는 게 비판의 요지다.
'설강화'의 경우는 그 시대를 겪었던 실제 민주화운동가들과 그들의 유가족이 입을 모아 "이 작품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각본을 쓴 유현미 작가를 비롯해 제작진·출연진이 '설강화'를 제작하기 전 민주화운동 관련 단체나 유가족을 만나 관련 이야기를 들었다거나 과거사를 특별히 깊게 연구했다는 이야기도 들리지 않는다.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에 극적인 장치를 넣기 위해 1980년대 삼엄했던 사회를 배경으로 깔았고, 가해자들에게도 '시대의 피해자'라는 미화된 롤을 부여했다. 철저하게 작품에 대한 욕심을 위해서만 아픈 역사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이 이어지는 이유다.
한 방송업계 관계자는 이번 '설강화' 논란에 대해 "정부가 검열을 안 하니 이제 대중들이 완장차고 나섰다는 비판이 있지만 시각을 달리 하면 결국 작품의 절대수용층이 이런 왜곡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다. 검열이라기 보단 불매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창작의 자유가 위축될 수 있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 수긍하나 실제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을 두고 '이걸 이용하면 잘 먹히겠다'는 생각으로 작품의 소재로만 활용한다면 그게 과연 자유라는 미명으로 포장될 수 있을지는 의견이 갈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JTBC 측은 이 같은 부정적인 반응에 정면돌파로 맞대응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23일 JTBC는 공식입장문을 내고 "'설강화'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방송 드라마의 특성상 한 번에 모든 서사를 공개할 수 없기 때문에 초반 전개에서 오해가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라며 "시청자분들의 우려를 덜어드리고자 방송을 예정보다 앞당겨 특별 편성하기로 했다"며 12월 24~26일까지 3~5회를 연이어 방영하겠다고 밝혔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