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릴까봐 참고 사는 감독들도 있다”
▲ K리그 승부조작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임된 대전 시티즌 왕선재 전 감독. 왕 전 감독은 일방적인 해임 통보는 축구 인생을 짓밟은 처사라고 강조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자식 같았던 선수들이 한두 명씩 사라지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아무 대책없이, 방법도 마련해 놓지 않고 무작정 물러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발을 뺀 난 편하게 지낼 수 있어도, 남아 있는 선수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래서 대책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런 가운데 전임 사장님이 구단 직원들과 코칭스태프 전원의 사표를 요구하셨다. 사표를 제출했지만, 전임 사장님께선 자신이 책임지고 물러날 테니, 감독인 난 선수단에 남아서 선수들을 계속 이끌어 달라고 부탁하셨다. 하지만 신임 사장님으로 바뀐 첫 날, 경기를 앞두고 있는 나한테 오셔선 이사회 결정이라며 물러날 것을 종용하신 것이다. 결과는 똑같다고 해도, 형식과 과정은 아주 큰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감독인 날 너무 우습게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이전에 두 차례 사표를 쓴 적이 있다고 들었다.
▲전임 사장님 계실 때였다. 믿었던 선수들에 대한 배신감과 어수선한 선수단에게 충격 요법을 보이기 위해선 내가 그만두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표를 제출했었는데, 번번이 전임 사장님이 반대하셨고, 결국 그냥 주저앉게 된 것이다.
―계약 기간이 5개월 남았다. 그 부분은 어떻게 마무리되는 건가?
▲구단 방침 상 잔여 연봉은 못 주겠다고 하더라. 깨끗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의 신임 사장님께 이런 말을 전했다. ‘난 이미 사퇴를 준비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해임 통보를 한다는 건, 한 지도자의 축구 인생을, 명예를 짓밟은 처사다. 한때 교수직까지 역임하신 분인데, 교육적인 측면에서도 이런 일처리는 절대로 옳지 않은 결정이다. 해임 통보하기 전에 날 불러서 먼저 의사를 물었다면, 대화를 나눴더라면, 이렇게 상처를 받진 않았을 것이다’라고.
―지도자로서 회의를 느낄 때가 많았나.
▲프로팀 감독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감독이 아니다. 시민 구단을 맡은 감독과 클럽팀을 맡고 있는 감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시민 구단은 시장 선거가 있거나, 구단 사장이 어느 당 소속이느냐에 따라 구단 전체가 흔들거린다. 그렇기 때문에 장기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선수들을 사고 파는데 감독이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김호 감독님도 그 부분 때문에 항상 구단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그만두시게 된 것이다. 그걸 옆에서 지켜본 나도, 결국엔 같은 전철을 밟게 됐다. 구단 사장이 감독을 마음대로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 구단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감독이 프런트 눈치를 보는 이상, 그는 감독이 아닌 구단 직원일 뿐이다. 자리 보전을 위해, 잘리지 않으려고, 하고 싶은 말 못하고,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도 참고 지내는 감독들도 있다. 참으로 서글픈 축구 지도자들의 자화상이다.
―승부조작에 연루된 선수들에 대해 회한이 많을 것 같다.
▲검찰에 구속되기 전, 선수들을 불러 놓고, 솔직하게 털어놓고 얘기하자고 말했더니, 자신들은 절대로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정말 10원짜리 하나 받은 거 없지?’라고 재차 물었고, 선수들은 ‘감독님 이름을 걸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난 선수들의 말을 추호의 의심 없이 100% 믿었다. 그 선수들을 창원지검까지 데려다 주면서도 별 일 없는 걸로 끝나리란 확신도 있었다. 그런데 검찰 조사 받은 애들이 10분도 안 돼서 자신들의 죄를 이실직고했다는 얘기를 듣고 기절할 뻔 했다.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을 아는가? 배신감보다는 표현 못할 허탈감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그 선수들이 모두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 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솔직히, 연맹이나 협회에서 선수들의 ‘목숨’을 그렇게 서둘러서 없애야 했는지 묻고 싶다. 검찰에 기소만 됐을 뿐, 재판이 시작된 것도 아니고, 재판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다. 모든 일이 다 정리 된 후에 선수들의 신분을 결정해도 늦지 않았다고 본다. 비난 여론을 선수들한테만 돌린 뒤, 그 선수들의 생명줄을 끊어버린 처사는 옳지 않다. 선수들이 저지른 죄에도 경중을 따져야 한다. 동료가 잘못된 길에 빠지는 걸 지켜보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는 얘기를 전하며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었을 때,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게 선수들이다. 다양한 상황, 환경, 죄의 무겁고 가벼움 등등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될 일들을 ‘영구제명’ 한 단어로 깨끗이 정리해 버렸다. 어렸을 때부터 축구만 했던 애들이다. 불구속 기소된 아이들은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는 탓에 유흥업소를 전전하다 점차 막장 인생으로 치닫게 된다. 연맹이나 협회 사람들한테 그 선수들의 미래는 안중에 없었다.
―오랜 인연을 맺었던 선수들과 아쉬운 이별을 했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수석코치로, 감독대행으로, 그리고 감독을 맡아서 선수들을 새끼처럼 여기고 살았다. 승부조작으로 동료 선수들이 떠나는 걸 지켜보며 그들이 가졌을 상처는 크고 깊다. 하지만 선수는 유니폼을 입고 있어야 한다. 새로운 감독님이 원하는 스타일을 빨리 캐치해서 살아 남기를 바란다. 지금 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준비하고 노력해서 축구로 보여줘라. 대전 시티즌의 유니폼이 부끄럽지 않게 말이다. 책임져주지 못하고 이렇게 나만 발을 빼서 정말 미안하다.
대전=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