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법 부장판사 승진제 폐지 여파 재판 장기화…검찰 조서 증거능력 제한으로 형사 재판도 길어질 전망
게다가 올해부터는 검찰이 피고인을 조사한 진술 조서도, 피고인이 ‘인정할 수 없다’고 거부하면 증거로 채택할 수 없게 됐다. 재판부가 피고인을 법정에 앉혀놓고 직접 물어가며 조서에 들어갔던 내용을 그대로 확인해야 한다. 민사는 물론 형사 재판도 장기화를 피할 수 없게 됐다(관련기사 검찰 발등에 불! 새해부터 바뀌는 ‘피의자 신문조서’ 논란).
해결책은 요원해 보인다. 법관 수를 늘리는 것도 쉽지 않다. 김명수 대법원장도 신년사에서 “‘신속한 재판’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지만, 실효성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미제분포지수’ 20선 무너졌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12월 31일 내놓은 신년사에서 올해 추진 과제로 ‘민사 1심 단독 관할 확대’를 꼽았다. 김 대법원장은 “1심부터 충실하고 신속하게 재판이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사건이 쌓이는 것에 비해, 재판 결과가 나오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첫 기일 지정 소요 시간 및 장기 미제율이 증가하자 내놓은 방책이다. 1심 민사 단독 관할 확대를 통해 재판부를 증설, 사건 처리 속도를 높여보겠다는 취지다. 법조일원화 시행 및 평생 법관제 정착으로 장기 경력 법관이 증가한 점 등을 고려할 때 1심 민사 단독 재판부에 ‘전문성’을 갖춘 법관을 배치해 최대한 많은 사건 처리를 도모한다는 계획이다.
대법원장이 신년 과제로 ‘신속한 재판’을 꼽을 만큼, 재판 장기화는 심각한 수준이다. 지난해 전국 법원 민사 합의부 1심 ‘미제분포지수’는 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전주혜 국민의힘 의원이 대법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법원 민사 합의부 1심 미제분포지수는 지난 10월 말 기준, 12.8을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최저치다.
미제분포지수는 사건 가운데 심리기간이 오래된, 일명 장기 미제 사건을 계산하는 지표로 6개월과 1년, 2년 등 처리되지 않은 기간에 가중치를 부여해 지표를 산출한다. 100을 기준으로 수치가 높을수록 오래된 미제 사건의 비율이 적고, 반대로 수치가 낮으면 오래된 미제 사건이 비율이 높다는 의미다.
10년여 전인 2010년 66.4에서 2017년 40, 2018년 36.4로 수치가 떨어지면서 미제분포지수는 지속적으로 악화돼왔다. 특히 2019년에는 34.8, 2020년 23.3을 기록하더니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20선이 무너지면서 12.8을 기록했다. 특히 전국 최대 규모의 법원인 서울중앙지법은 민사 합의부 1심 미제분포지수는 -5.6,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대에 진입했다.
변호사들의 불만도 상당하다.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는 “법원이 재판 처리 속도가 사상 최악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사건을 1~2년씩 묵히는 경우가 많아졌고, 자연스레 변호사들이 의뢰인들로부터 ‘빨리 재판 결과가 나오게끔 재판부에게 얘기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다”며 “오죽하면 전관 변호사를 선택하는 이유가 ‘승소’ 아닌 ‘빠른 사건 처리’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고 지적했다.
#법원 신뢰도마저 떨어질라
이 같은 문제는 사실 판사들 사이에서도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내용이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2심 민사에 사건이 올라오는 수가 줄어서 ‘2심은 한가하다’는 얘기가 나온다”며 “1심 재판부들이 과거보다 사건 처리 속도가 크게 떨어져서 그런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러 요인이 꼽히지만,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를 꼽는 이들이 적지 않다. 과거 승진제도가 있을 때는 ‘인정받고 승진하기 위해’ 복잡하거나 어려운 사건을 처리하려 야근은 물론 주말근무까지 하는 경우가 빈번했는데, 승진 제도 폐지 후에는 ‘9시 출근-6시 퇴근’이 고착화되면서 단순 사건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게 일반화됐다는 설명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에 근무한 적이 있는 한 판사는 “과거에는 장기 미제 사건이 얼마나 있는지를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와 같은 책임자들이 확인해 재판부에 빠른 사건 처리를 독려했고, 이게 ‘승진을 위한 평가’ 성격이 있다 보니 성과로 이어졌는데 이제 그런 문화는 사라졌다”며 “재판 개입이라는 얘기를 듣지 않기 위해 법원장이나 수석부장판사가 일반 판사들의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면서 이제 독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부장판사들도 승진을 위해 배석판사들을 압박했고, 이게 사건 처리 속도를 끌어올리는 효과도 있었는데 이제는 부장판사도 배석판사들 눈치를 보면서 사건 처리를 독려하지 못하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실제 민사 합의부 배석판사들은 일주일에 3건 정도의 사건만 처리하기로 기준을 맞추면서 사건 처리가 경직화됐다는 얘기도 나온다.
법관 수를 늘리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지만, 예산 확보 등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1심 민사 단독 관할 확대를 꺼내든 것도 마지막 카드라는 얘기가 나오는 대목이다.
판사들의 반응은 회의적이다. 앞선 형사합의부에 근무한 경험이 있는 한 판사는 “합의부 사건을 단독 재판부로 보내면 미제 사건이 줄어드는 게 아니라, 민사 단독 재판부의 미제분포지수까지 나빠지게 될 것”이라며 “미제 장기 사건은 그만큼 복잡하고 처리하기 힘든 사건이라는 뜻인데 단독 재판부가 이를 환영할 리가 없지 않나”라고 지적했다.
특히 민사에 이어, 형사 사건도 재판 장기화가 불가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올해부터 검찰의 피고인 진술 조서 증거 효력이 없어지게 되면서 재판 장기화는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이 진술 조서의 증거 효력을 거부하면 재판부가 직접 재판정에서 피고인과 검찰에게 물어가면서 확인해야 한다. 검찰이 피고인을 불러 조사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재판정에서 소비해야 한다.
올해 법원 최대 화두로 ‘재판 장기화 해결’이 꼽히는 이유다. 판사 출신 변호사는 “판사들의 사건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인센티브 등의 인사 정책이 필요한 것 같다”며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법원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