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각돼도 잃을 것 없어’ 재판 지연 전략 활용…‘엄격 심사’ 법원 불신 높아 마냥 기각하기도 부담
문제는 전년 대비 1.5배 가까운 기피신청 급증 추세다. 본래 취지는 ‘재판 공정성 확보’였지만 이를 충족시킬 만한 재판부 기피 신청은 손에 꼽는다는 게 판사들의 하소연이다. 재판을 지연시키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에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변호 전략으로 전락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굵직한 사건마다 등장
[사례 A] 지하조직 ‘자주통일 충북동지회’(충북동지회)를 결성해 간첩단 활동을 한 혐의(국가보안법 위반)로 재판을 받는 박 아무개 씨 등 3명은 최근 법원에 재판부를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국가보안법상 간첩, 특수잠입·탈출, 이적단체 구성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들은 법관이 불공정한 재판을 할 우려가 있다며, 청주지법에 법관기피 신청서를 제출했다.
박 씨 등은 2021년 말, 건강상 이유와 방어권 보장 등을 이유로 재판부에 보석과 구속집행정지를 신청함과 동시에 국보법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과 변론 분리를 신청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이 같은 신청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않자 “재판권 남용으로 재판 절차의 형평성을 위배했다”며 “검사가 법원의 허가를 얻어 공소장을 변경했는데도 재판부가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 고지하지 않았다”며 재판 과정의 불공정한 진행을 주장했다.
[사례 B]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으로 3년 넘게 재판을 받고 있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여전히 재판부 기피신청을 놓고 법정에서 공방 중이다. 임 전 차장 측은 서울중앙지법 1심 재판부가 “이미 예단을 내려놓은 상태로 재판을 진행한다”며 기피신청을 냈지만 기각됐다. 하지만 “기피신청 기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즉시항고했고 서울고법은 1심 재판부의 기각 결정을 파기하며 임 전 차장 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서울고법이 임 전 차장 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중앙지법 다른 재판부가 기피신청을 살펴보게 됐다. 그때까지 임 전 차장 재판은 중단된다.
[사례 C]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 유족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 중인데, 이 사건 재판부에 대해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다. 유족을 대리하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은 법관이 2003년부터 10년 넘게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로 활동했다며 “담당 사건의 피고들 소송대리인 사이 특수관계가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전관 변호사 선임 이유가…
이처럼 재판부 기피신청이 이뤄지는 케이스는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형사소송법에는 ‘검사나 피고인은 법관이 불공평한 재판을 할 염려가 있을 때 법관의 기피를 신청할 수 있고(18조) 기피신청에 대한 재판은 기피당한 법관이 소속된 법원 합의부가 맡으며 해당 법관은 관여하지 못한다(21조)’고 명시돼 있다.
물론 재판부도 기피 신청의 목적이 소송의 지연이라는 점이 명백하다면 이를 기각할 수 있다. 피고인 역시 즉시항고를 통해 2심(고법)의 판단을 받아볼 수 있고, 그동안 재판은 지연된다. 기각되더라도 피고인 입장에서 ‘잃을 게 없는 전략’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재판부 기피신청을 고민했던 한 변호사는 “재판부가 심증을 강하게 드러내는 경우, 또 재판부가 유죄 판결 시 양형이 높은 편이라고 판단되는 경우 재판부 기피신청을 할 수 있는 사유가 있는지 고민해본다”며 “담당 판사가 인사로 교체를 앞둔 경우에는 기피신청을 통해 시간을 벌고 새로운 판사한테 결과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구속된 피고인들의 경우 구치소에서 다른 동료들과 ‘어느 재판부가 양형이 세고, 어느 재판부는 양형이 약하다’는 얘기를 듣고 재판부를 옮겨서 판단을 받게 해달라고 하기도 한다”며 “재판부 기피신청이 이런 의뢰인들의 요청 때문에 이뤄지는 경우도 있고 재판부가 먼저 회피(전관 변호사 등이 들어와 법관이 스스로 배제 요청을 하는 경우)를 하도록 일부러 인연이 있는 변호사를 추가로 선임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를 압박하는 효과도 있다. 검사 출신의 변호사는 “재판부가 공판 진행 과정에서 문제가 될 만한 발언들을 했다면 이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재판부 기피신청을 할 수 있다. 그럴 경우 더욱 조심해서 재판을 진행하지 않겠느냐”며 “양형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가 더 적은 것 같다”고 풀이했다.
#뉴스 탓에 늘었다?
그러다 보니 법관 기피신청은 크게 늘었다. 2020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재판부와 법관 기피·회피·제척 건수(민·형사 합계)는 1533건으로 전년 대비 633건 급증했다. 2014년 1041건을 기록한 뒤 매년 감소하다가 2017년(694건), 2018년(753건), 2019년(900건)까지 매년 증가했다. 법원 내에서는 2021년에 규모가 조금 줄더라도 지속적으로 기피신청이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상당하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특정 신청인들이 반복적으로 수백 건에 달하는 기피신청을 내서 급증한 것도 있지만,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이 이를 활용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더 잦은 신청이 이뤄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내다봤다. 실제 2017년 이후 매년 100건 안팎의 기피신청 등이 늘어난 점은 ‘사법행정권 남용 재판 관련 기피신청이 보도된 탓’으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물론 법원은 재판 지연 등을 목적으로 기피신청 제도를 악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심사를 엄격하게 하고 있다. 2016년부터 5년 동안 인용된 기피·회피·제척 신청은 총 9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법원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어, 신청이 늘어날 경우 마냥 ‘기각’하기만도 부담스러운 상황이 올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우리나라는 1심 재판부가 판단을 내려도 이에 불복하고 2심, 3심까지 받아야 한다고 대다수의 사건 관계자들이 생각하고 있고 실제 3심까지 가는 경우가 대다수”라며 “안 그래도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높은 상황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등이 터지면서 법관 개개인에 대한 신뢰도가 더 낮아진 것이 이 같은 현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