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 고문치사 6월항쟁 신호탄, ‘고문기술자’ 이근안 악명 높아…경찰청 인권센터 거쳐 민주인권기념관 증축공사 한창
1987년 1월 15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군 사망원인을 설명하던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박처원 대공수사처장이 내놓은 답변이다. 하지만 박 군은 경찰에 연행돼 물고문을 받다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고, 그의 죽음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신호탄이 됐다.
고 박종철 열사가 연행돼 끌려간 곳은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대공분실은 경찰청 보안국이 설치했던 기관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곳이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 위치한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대공분실은 명목상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조사하는 곳이었지만, 대중들에게는 군부정권에 대항하는 인사들을 데려와 취조·고문을 통해 범죄자로 조작하는 곳으로 인식됐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은 민주화운동 인사 중에는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있다. 김 전 의장은 1985년 서울대 민추위 사건으로 구속돼 풀려나는 도중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23일간 고문을 당했다.
김 전 의장은 잠 안 재우기, 날개꺾기,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겪으면서도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당시 상황과 관련자들을 하나하나 기억했다. 그리고 법정 등에서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자행된 고문의 실체를 증언해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김 전 의장은 1985년 12월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본인은 1985년 9월 4일부터 20일까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각 5시간 정도 당했다. 9월 4일 각 5시간씩 두 차례 물고문을 당했고, 9월 5일과 6일 한 차례씩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골고루 당했다. 8일에는 두 차례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10일 한 차례, 13일 두 차례, 20일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한 차례 받았다. 9월 25일 집단적인 폭행을 당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구타를 당했다. 잠을 못 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밥을 굶긴 것도 대략 절반쯤 된다. 고문 때문에 13일 이후에는 밥을 먹지 못했다. 9월 25일 마침내 항복을 하게 됐다. 하루만 더 버티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더 버틸 수 없었다. 본인에게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했다. 저는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다.”
김 전 의장은 자신의 수기 ‘남영동’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해 “남영동 5층 구석방에서의 23일, 이것은 지옥이었다. 독가스 대신 전기고문과 물고문이 설치는 나치 수용소였다. 시간이 종국적으로 멈춰 버린 영원한 저주의 세계였다”라고 표현했다.
이후 김 전 의장은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과 뇌정맥혈전증 등 병을 얻어 고생했다. 전신마취를 위해 눕거나 치과 치료용 드릴 돌아가는 소리만으로도 고문에 대한 기억이 살아나 평생 제대로 된 병원 치료도 받지 않았다. 결국 김 전 의장은 고문에 따른 지병이 악화돼 2011년 12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 전 의장을 비롯해 몇몇 고문 피해자들 증언으로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행한 경찰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고문 기술자’로 불린 이근안 당시 경감이다. 김 전 의장을 고문한 자도 이근안이었다. 당시 경기도경찰국 소속이었던 이근안은 남영동 대공분실로 출장까지 나와 고문을 자행하며 인권을 유린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1988년 12월 이근안의 얼굴과 이름 등 실체가 언론 등을 통해 만천하에 밝혀졌고, 이근안은 사표를 내고 잠적했다. 그러다 1999년 10월 수원지검 성남지청에 자수하면서 10년 10개월 동안의 도피 행각이 막을 내리게 됐다. 그는 고문 혐의 등에 대해 2000년 대법원에서 징역 7년을 확정 받아, 2006년 11월 만기 출소했다.
이후 그는 대한예수장로회에서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됐다. 하지만 “고문은 예술이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 등의 반성 없는 망언을 하더니, 김 전 의장 죽음으로 과거 전력이 다시금 세간의 화제가 돼 교단에서 면직됐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 대간첩 수사를 명목으로 만들어졌다. 건물은 ‘국제해양연구소’라는 간판으로 위장돼 있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김수근이 남영동 대공분실을 설계했다. 외관은 김수근 특유의 검은 벽돌로 세련됨을 자랑한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두려움을 떨 수밖에 없는 악명 높은 설계로 이뤄졌다.
밖에서도 볼 수 있듯이 고문실 창문은 폭이 20cm에 불과할 정도로 세로로 길고 좁다. 사람이 창문으로 나갈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채광량도 적게 해 조사 받는 사람의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수용자용 나선형의 어둡고 좁은 원형 철제 계단이 있어, 다른 층을 통하지 않고 수용자를 뒷문에서 조사실로 곧바로 데려갈 수 있다. 얼굴에 검은 자루를 쓰고 연행된 사람들은 원형 계단으로 인해 방향감각과 층수 개념을 상실하게 된다.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비상구나 통로 문도 다른 취조실과 똑같은 모양과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조사받는 사람이 쉽게 탈출할 수 없게 하기 위함이라고 알려졌다.
또한 조사실 방마다 문을 엇갈리게 설치했다. 이에 문을 열면 보이는 것이 벽면뿐이다. 고문당하는 사람들끼리 마주쳐서 신호를 주고받는 상황을 방지하고, 시각적 불안정을 야기해 공포감을 부추기는 목적으로 해석된다. 특히 취조실 벽은 흡음판으로 도배돼 고문 소리와 비명소리가 외부에 전달되지 않게 했고, 방마다 샤워기와 욕조가 설치돼 물고문을 가능케 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 7월부터 경찰청 인권센터로 쓰였다. 과거 경찰이 행했던 과거를 반성하고자 하는 취지였다. 고 박종철 열사에 대한 고문치사가 이뤄졌던 509호 조사실은 그대로 복원돼, 고인의 희생을 기리는 영정과 조화가 놓여 있다.
박 열사 31주기를 앞둔 2018년 1월 13일 509호 조사실에 이철성 당시 경찰청장 등 경찰 지휘부가 공식 방문해 추모했다. 경찰 지휘부가 단체로 방문해 헌화와 묵념을 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6월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힘에 따라 경찰은 그해 12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을 경찰청 상위 조직인 행정안전부에 넘겼다. 행안부는 기념관 관리 권한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위탁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2021년 3월부터 증축공사에 들어갔다. 현재는 대공분실 건물 앞 공간에 대한 공사가 진행 중이라 출입을 막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측은 “기존 대공분실 건물은 그대로 남겨둔다. 고 박종철 열사 추모공간 등 5층 조사실은 현 상태로 보존하고, 경찰의 사무공간은 리모델링을 통해 시민들이 활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강할 계획”이라며 “또한 기존 건물 앞 터에 지상 4층 지하 2층 규모의 공간을 증축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023년 6월 민주인권기념관(가칭)을 열 예정이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