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대신 음악에 ‘푹’ 삶의 질이 달라져요
▲ 악기를 배우는 직장인들이 많아지면서 직장인 밴드도 붐이다. 사진은 한 병원의 간호사 밴드. 윤성호 기자 cybercoc1@ilyo.co.kr |
최근 한 취업포털에서 ‘직장인 악기 열풍’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26.5%가 현재 악기를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이 중 44.1%가 기타를 배우고 있다고 답했다. 그만큼 악기 열풍을 주도하는 악기가 바로 기타다. 출판사에 근무하는 K 씨(여·33)도 8월 초부터 기타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기타를 마련한 것은 이미 오래전. 가볍게 배운 경험도 있다.
“20대 중반부터 계속 배우고 싶었지만 시간상 배울 수가 없었어요. 이제는 직장생활도 많이 안정돼서 예전에 다녔던 학원에 다시 등록하러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빈 타임이 없을 정도로 시간표가 꽉 차 있더라고요. 몇 달 새 인기가 이렇게 높아졌나 싶었어요. 제가 처음 학원에 문의했을 때는 원하는 시간 아무 때나 레슨을 받을 수 있었거든요. 학원 원장도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그러대요. 빨리 뭘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기초를 탄탄히 닦아서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같이 연주하고 싶습니다.”
트렌드의 영향을 실감하지만 그 때문에 배우는 건 아니라는 K 씨와 달리 최근의 악기 열풍 때문에 다시 음악을 떠올리게 된 직장인도 있다. 의류회사에 다니는 C 씨(여·32)는 요즘 재즈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어릴 때 클래식 피아노를 배운 적은 있지만 학교 다니고, 직장생활하면서 까맣게 잊고 살다가 주변에서 악기 배운다는 동료들 때문에 마음이 흔들렸단다.
“피아노가 조율도 엉망이고 먼지가 뽀얗게 쌓일 정도로 신경 안 쓰고 살았어요. 그러다 최근에 밴드를 한다, 기타를 배운다 하는 동료들이 많아지더라고요. 저는 생전 처음 만지는 악기보다는 그래도 조금 아는 게 낫지 싶어서 피아노를 선택했어요. 클래식 피아노를 배웠더니 악보만 보고 수동적으로 연주를 하게 돼서 금세 지루해지곤 했거든요. 요즘에는 재즈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데 이게 이렇게 재미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빨리 집에 가서 피아노 쳐봐야지 하는 생각 때문에 귀가 시간이 빨라졌을 정도예요.”
직장인 밴드 붐에 ‘록 밴드’ 멤버를 꿈꾸는 이들도 많아졌다. 직장인 밴드 경연대회의 횟수도 많아지고, 그 규모도 커졌다. 어지간한 중견·대기업은 사내 밴드가 일반적이다. 외식업체에 근무하는 L 씨(33)는 요새 밴드 조직 때문에 바빠졌다. 아직 회사에서 새롭게 밴드 구성을 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바쁘지만 마음만은 즐겁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 밴드가 있었는데 저 같은 초보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지난해 지금 회사로 이직했는데 밴드가 없어요. 다른 연합 직장인 밴드 동호회도 알아봤지만 매일 얼굴 보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게 더 낫겠더라고요. 드럼이랑 기타를 치는 분은 있어서 저는 요즘 베이스 기타를 배우고 있습니다. 솔직히 드럼이 배우고 싶었는데 일단 공석인 악기부터 메워야죠. 회사에 연습실 지원 신청도 하고 상사한테 협조 얻으려고 일도 열심히 하면서 아부도 좀 하고 요새 바쁘네요. 빨리 실력을 키워 데뷔 공연을 갖고 싶습니다.”
악기 배우기 열풍에는 나이가 따로 없다. 삶의 여유를 갖게 되는 40~50대에 악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직장인들도 꽤 된다. 공기업에 다니는 Y 씨(여·49)는 요즘 드럼 배우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퇴근 후 꼬박꼬박 사무실 인근 학원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한번 학원에 가면 적어도 두 시간 이상 연습을 해요. 좋아하는 노래를 틀어놓고 드럼을 치는데 그러면 마치 제가 직접 무대에서 그 노래를 연주하는 기분이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어머나’라는 노래를 배웠는데요, 스스로 연주하면서도 너무 신나서 몸이 들썩이더라고요. 처음에 학원 갈 때는 나이가 너무 많지 않을까, 여자인데 드럼은 좀 무리인가 하는 걱정도 들었어요. 막상 가보니 기우였습니다. 저보다 나이 많은 직장인들도 꽤 있더라고요. 이제 서로 은근히 경쟁도 하면서 친구가 됐습니다. 젊은이들보다야 배우는 게 아무래도 좀 더디겠지만 즐기는 마음으로 하니까 실력향상에 대한 조바심은 많이 없어요.”
악기 배우기 열풍은 이미 악기를 연주하는 직장인들에게도 좋은 핑계거리가 된다. 악기를 배우기 위해 회식을 빠지거나 정시 퇴근을 할 때 예전처럼 크게 눈치 보지 않아도 빠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H 씨(31)는 요새 이런 분위기 때문에 마음이 편해졌단다.
“원래 베이스 기타를 쳤고 직장인 밴드 활동 했던 경험도 있어서 악기는 익숙한 편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악기에도 관심이 가더라고요. 재작년 가을부터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안하던 걸 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이 악기 자체가 굉장히 어렵더라고요. 아주 조금씩 늘어서 요새도 초보 수준을 못 벗어나고 있습니다. 소리가 커서 집에서는 연습을 못하고 퇴근 후 학원에 가는데 처음 배울 때는 악기 배우러 간다고 하고 퇴근할 때 뒤통수가 찌릿했습니다. 지금은 사무실에 다른 악기 배우는 동료들도 많고 해서 괜찮습니다. 내년 초에 결혼할 때 축가를 트럼펫으로 직접 불어보려고 더 열심히 하고 있어요.”
물류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J 씨(28)도 원래 드럼을 쳤다. 계속 하고 싶지만 공간 제약과 소리 때문에 최근 다른 타악기 종류로 갈아탔다고.
“직장 다니면서 연습을 하려니 집에서 해야 할 때가 많은데 드럼은 아무래도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타악기 종류로 알아본 게 바로 서아프리카 전통 북 젬베(Jembe)입니다. 요즘 젬베를 치면서 노래하는 인디밴드나 가수들도 꽤 늘어서 동호회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더라고요. 지난달에 젬베 구입해서 집에서 조금씩 연습하고 있는데 소리도 굉장히 맘에 들고 퇴근하고 집에서 연주할 수 있어서 좋네요.”
음악은 삶의 활력소가 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 매일같이 술만 마셔대지 말고 용기를 내서 악기 하나 배워보는 건 어떨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