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꿈이 내 꿈 ‘올림픽 가는 거야~’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2010년 귀화 혼혈 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인천 전자랜드에 지명됐던 문태종은 특유의 해결사 기질과 뛰어난 팀플레이로 전자랜드를 준우승으로 이끌었고 MVP 후보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문태종은 7월 21일, LG에서 활약하는 동생 문태영과 함께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KCC 전태풍, 삼성 이승준, 동생 문태영과 함께 치열한 경쟁 끝에 허재 대표팀 감독의 낙점을 받고 감격스런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지난 8월 8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렸던 존스컵국제농구대회에 한국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나섰던 문태종. 9경기 평균 14.9점에다 3.9리바운드, 1.6어시스트, 그리고 장기인 3점슛을 경기당 3.1개씩 터트리며 허재 감독을 마냥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 대회를 통해 ‘태종대왕’ ‘클래스가 다른 에이스’라고 인정받게 된 문태종을 만났다.
#태극마크=문태종은 KBL 데뷔 무대였던 지난 시즌, 경기에 나설 때마다 흰색 헤어 밴드에 ‘팬 여러분 사랑합니다’라는 문구와 태극기를 새기고 출전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슴에 대표팀 멤버를 상징하는 태극마크가 달려 있는 유니폼을 입고 있다.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머님이 아버지와 결혼하실 때 외갓집 식구들이 크게 반대했다고 들었다. 그 후론 어머님은 외가쪽 친척들을 만나지 못했다. 30년 넘게 그렇게 사시다 동생 태영이가 한국에서 농구를 하게 됐고, 1년 후에 나까지 KBL 무대를 뛰게 됐다. 이런 상황들이 자연스레 어머님과 외가 가족들의 거리감을 조금씩 좁힐 수 있었고, 태영이랑 내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외가에선 우리 형제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더욱이 내가 태극마크를 달고 한국대표팀에서 뛰게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외가에서 너무 너무 좋아하셨고, 그동안 마음의 문을 닫고 있었던 외가 가족들과 어머님이 비로소 화해를 하셨다. 솔직히 난 태극마크의 의미보다 태영이와 날 통해 어머님의 가족들이 서로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더 감격적이다.”
문태종의 어머니 문송애 씨는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미군 부대에서 공군으로 재직 중이었던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결혼을 하게 된다. 미군 부대에서 일한 아버지 덕분에 평소 외국인과 스스럼없이 지냈던 문 씨에겐 자연스런 만남이었지만, 정작 가족들은 문 씨가 외국인과 결혼하는 데 대해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감행한 문 씨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떠나면서 자연스레 가족들과도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문 씨의 남편, 즉 문태종의 아버지도 농구 선수로 활약했었고, 현재 하부 리그인 미국농구협회(ABA) 소속의 한 구단에서 단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아쉬움=1975년생인 문태종. 한국 선수들 사이에서도 그는 ‘왕고참’급이다. 아무리 유럽에서 쟁쟁한 실력을 선보였고, 최고의 기량을 가진 선수라고 해도 세월의 흐름 앞에선 체력이 부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태종은 대표팀에서 체력적인 문제를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한다.
▲ ❶문태종(인천 전자랜드)의 어머니 문송애 씨와 동생 문태영(창원 LG)의 부인과 딸이 함께 찍은 사진. ❷지난해 말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10-2011 모비스프로농구 플레이오프 미디어데이에서 혼혈농구 선수와 가족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문태종 가족, 전태풍 가족, 문태영 가족. |
#조국=문태종은 동생 태영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이 대단하다. 동생이 먼저 KBL에서 경험을 쌓고, 자신을 이끌었기 때문에 보다 수월하게 한국행을 결정할 수 있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세르비아 등 유럽 명문리그에서 10년 이상 주전으로 뛰었던 문태종은 세르비아리그로부터 연봉 30만 달러를 제시받았지만, 1억 원을 받는 KBL로 향했다. 물론 올 시즌 연봉이 4억 6000만 원으로, 360%나 인상된 터라 그의 한국행은 여러 가지 면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
“만약 동생이 한국에서 먼저 생활하지 않았더라면, 나 또한 한국에서의 선수생활을 쉽게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동안 참 많은 나라, 리그를 경험했었다. 물론 지금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운동을 한 적도 있지만, 한국처럼 편하지가 않았다. 나랑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지만, 가슴으로는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기에, 한국 사람이 편했고, 한국 선수들이 그저 좋았다. 여긴 내 나라, 내 조국이기 때문이다.”
태극마크를 놓고 경쟁을 벌였던 동생 문태영. 형은 그런 동생을 향해 “난 지금 아니면 앞으로 기약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동생은 앞으로 또 기회가 있을 수 있으니 너무 배 아파하지 말라고 했다”며 웃음을 터트린다.
#위기=허재 감독이 1명만 선발 가능한 귀화 혼혈선수 대표 자리에 문태종을 뽑은 가장 큰 이유는 전문 슈터 부재를 해결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허 감독은 문태종이 슛을 쏠 때의 자세가 굉장히 안정적이고, 가끔은 슛을 쏠 때의 스냅 동작이 ‘아름답게’ 보일 정도라고 칭찬했다. 한국 농구가 국제대회에서 번번이 전문 슈터 부재로 무릎을 꿇었던 터라 허 감독은 문태종이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을 정도다.
그런데 문태종은 자신이 이렇게 슈터로서 진가를 드러내게 된 배경에는 고등학교 때 당한 손목 부상이 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손목 부상을 당했다. 복귀하기까지 3개월가량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때 재활 훈련을 하면서 슛 연습을 많이 하게 됐고, 안정감 있는 슛이 터지면서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됐다. 만약 그때 부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전문 슈터로 활약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한테는 그 당시의 위기가 절호의 기회로 작용한 셈이다.”
#NBA=서울 용산에서 태어난 문태종은 군인인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미국과 유럽을 떠돌며 생활했다. 잦은 이사와 잦은 전학으로 고달픈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농구 선수가 된 중학교 이후 리치먼드대까지, 그는 가는 곳마다 농구 천재로 통했다. 농구를 시작하면서 NBA 진출을 꿈꿨던 문태종. 다행이 마이애미 히트에 발탁이 됐고 팀 합류를 준비 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미국프로농구협회(NBA) 소속 선수들의 파업으로 신규 선수 모집이 중단되면서 그의 꿈이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프랑스로 방향을 틀 수밖에 없었다.
“그때가 내 농구 인생의 최대 위기였다. 마음은 NBA를 떠나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 생활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입단 첫 해에 MVP가 됐지만 NBA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여름만 되면 클리블랜드, 피닉스 등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하며 계속해서 NBA 무대를 노크했다. 그런데 번번이 실패였다. 비로소 내가 NBA와 인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걸 인정하기가 힘들었고 가슴이 아팠다.”
#도전, 그리고 꿈=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한 농구대표팀. 허재 감독은 사석에서 ‘한’으로 남은 올림픽 진출에 대한 갈망을 자주 어필하곤 했다. 그때마다 허 감독의 입에선 ‘문태종’이란 이름이 거론됐다. 문태종이야말로 자신의 꿈을 이룰 ‘해결사’라는 얘기였다. 이에 대해 문태종은 “감독님의 꿈도 그렇겠지만, 내 꿈도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 무대에서 뛰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평소에는 상대팀 선수로 만났던 선수들과 대표팀에서 함께 생활하며 새로운 친분을 형성할 수 있었다. 정말 실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고, 그중에서도 하승진, 김주성, 양동근 등은 다른 팀이 아닌 우리 팀에서 함께 뛰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웃음). 이렇게 좋은 선수들과 함께 멋진 작품을 만들고 싶다. 감독님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들도 그런 목표와 희망을 숨기지 않는다. 이제 그 꿈을 이룰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문태종은 한국 무대에서 은퇴하길 소원했다. 그래서 은퇴 후의 계획에 대해 질문했더니, “은퇴는 해도 농구를 계속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한국에서 농구 선수를 꿈꾸는 어린아이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한다. 참으로 근사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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