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펜싱을 왜 하니? 재능 없는 걸 증명하려고 하니?”
IMF 외환위기에 학교도 펜싱부를 폐쇄했는데 여전히 펜싱이 좋다며 펜싱을 할 수 있는 학교로 전학을 가겠다는 딸을 막는 엄마의 말은 정답처럼 보일수록 재수가 없다. 그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셨는데도 방송을 해야 해서 장례식장에도 나타나지 않는 현실파 엄마였다. 늘 주인공을 응원했던 아빠는 돌아가셨고, 가족이라고 남아있는 것은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뿐이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이야기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이제 자기의식이 생기기 시작했으나 세상의 응원을 받지 못하는 외로운 젊음들이 방황의 날들에 서로를 격려하며 성장해가는 착한 드라마다. 착한 드라마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 있는 것은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심에서 나오는 따뜻한 사랑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네가 이유 없이 나를 응원했듯이 내가 너를 응원할 차례가 된 거야. 네가 어디에 있든 네가 있는 곳에 내 응원이 닿게 할게. 내가 가서 닿을게.”
IMF 외환위기 때 부도를 낸 아버지 때문에 도망치듯 삶의 근거지를 떠난 친구의 삐삐에 녹음해놓은 주인공 희도의 말이다. 서로 만날 수 없는 날들에도 마음으로 응원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친구, 귀한 친구다. 그런 친구가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것은 살아갈 이유가 된다. 그 친구는 정말 동전이 있을 때마다 공중전화박스에 들러 친구의 말을 듣고 또 들으며 힘을 얻는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1998년, 시대에게 꿈을 빼앗긴 청춘들의 방황과 성장을 그린 청량 로맨스”라고 광고했다. 시대에게 꿈을 빼앗겼다는 것은 IMF 위기로 집이 망하거나 폭력 교사에게 저항하다 학교를 떠나거나 해서 가슴에 품었던 꿈이 산산조각 난 듯 보이는 시절이라는 뜻이리라.
그러나 돌이켜보면 청춘들의 꿈을 응원해준 시대가 있었던가. 시대는 늘 버겁고, 이제 자기 삶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하는 청춘들은 늘 막막하다. 이제 자기 길을 찾아야 하는 청춘이 막막하고 버겁기만 한 것은 과거의 청춘들이 걸었던 길은 길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청춘들이 걸어온 길이, 길이 아닌 것은 그들의 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길을 걷는 청춘은 안다. 길에는 이정표가 없다는 것을. 아니, 수많은 이정표가 있지만 그것은 ‘나’의 이정표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니 자신의 ‘촉’밖에 믿을 게 없는데, 그 촉이라는 것도 길 위에서 벼려지는 것이라 외롭고 팍팍한 시간을 견뎌야 한다.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은 종종 있고, 때로는 영 일어날 수 없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또 길 위에서 넘어진 자, 길을 딛고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시간을 통과하며 청춘을 지나온 우리에겐 보인다. 청춘들의 허점과 실수가. 그래서 충고해주고 싶다. 그러나 충고는 하지 않을수록 좋다. 젊은 날 우리가 그랬듯, 그들도 듣지 않는다. 섣부르게 지적하고 간섭하고 충고하려 들면 충고가 먹히는 것이 아니라 ‘꼰대’의 벽 속에 갇힌다.
충고가 외면당하는 이유는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무게, ‘나’의 무게를 지고 오며, 어느 날 문득 뒤돌아봤을 때 우리도 느끼지 않았는가. 삶에는 지름길이 없다는 사실을.
청춘들의 허점이 보이는가. 실패할 것 같아 안타까운가. 그들이 선택이 안전해 보이지 않아 초조한가. 우리의 할 일은 간섭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문에 섭섭해지고 초조해지고 화가 나는 마음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소화해내고, 기다려주는 것뿐이다. 우리의 일은 그들 때문에 촉발된 우리의 감정을 돌보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일을 잘 해야 그들의 삶은 그들의 촉으로 벼려가야 할 그들의 것이라는 것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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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