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어머니의 이름으로’ 차기 찜
▲ 지난 2003년 고 정몽헌 회장 빈소에서 맏딸 지이씨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다. | ||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현 회장 방북길에 동행해 김정일 위원장의 깊은 관심을 샀던 현 회장 맏딸 정지이씨에 재계와 여론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인터넷 검색 순위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단숨에 유명인사가 된 정지이씨는 차후 현대그룹을 물려받을 후계자감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미망인 현정은 회장이 총수직에 오른 지 2년여가 지난 지금 그 딸인 28세 정지이씨가 여성 후계자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현 회장이 김 위원장과 단독면담을 나눈 것은 지난 7월16일의 일이다. 다음날인 17일 강원 고성 남측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도착한 현 회장은 기자들에게 방북 성과에 대한 1차 브리핑을 했다. 이 자리에서 현 회장이 밝힌 내용은 김 위원장이 백두산 관광을 내주었다는 것과 개성관광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자세하게 소개된 것은 김 위원장이 정지이씨에게 보인 관심이었다. 김 위원장이 정주영-몽헌 부자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하며 정지이씨에게 “안경만 쓰면 아버지와 똑같다”는 말을 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언론은 현대상선에서 과장으로 재직중인 정지이씨에 대한 이야기를 앞다퉈 보도했다. 이 중에는 그가 후계자로 지목받았다는 내용까지 등장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이에 대해 현대아산 관계자는 “(지이씨가) 맏딸이니까 언젠가는 경영을 물려받을 수도 있지 않겠나”고만 밝혔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후계구도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 대개의 재벌들은 확대해석을 잔뜩 경계하기 마련이다. 경영승계 과정에 대한 언론이나 시민단체 등의 시선이 따가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정지이씨 후계자설에 대해 현대그룹은 그다지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한다. 오히려 정지이씨가 새로운 실력자로 부각되는 것이 싫지 않은 기색이라는 평도 나온다.
현대그룹 사정에 밝은 한 재계 인사는 “백두산 관광 합의 발표 이후 정지이씨가 현 회장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정신적 버팀목 역할을 해준다거나 영어에 능통한 재원이라는 점, 그리고 SUV 차량을 타고 다니는 개성파라는 점 등이 알려지며 정지이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며 “일각에선 ‘정지이 띄우기가 시작됐다’는 평도 나온다”고 재계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렇듯 정지이씨가 대내외적 위상을 높이는 사이 김윤규 현대아산 부회장 입지의 퇴조가 눈에 띈다는 대조적인 시각도 등장하고 있다. 김 부회장은 정주영-몽헌 부자와 더불어 현대의 대북사업 과정에서 간판급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그러나 이번 백두산 관광 합의는 현 회장과 김정일 위원장 독대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김 위원장이 정지이씨에게 보인 관심과는 대조적으로 대북사업 파트너로서 중추적 역할을 해온 김 부회장과 관련한 김 위원장의 어떤 멘트도 소개되지 않았다.
올 초 현대아산에선 ‘김윤규 사장→부회장, 윤만준 고문→사장’의 인사가 단행된 바 있다. 당시 현대아산측은 이 인사의 배경에 대해 대외적인 대북 사업은 김 부회장이, 내부 업무는 윤 사장이 나눠서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계에선 김 부회장의 활동반경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하고 있다.
이에 대해 현대측은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눈치다. 현대아산측 관계자는 “임원진의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본인들 외에는 잘 모를 수밖에 없다”고만 밝혔다. 그러나 그룹 안팎에선 김 부회장의 입지가 줄어드는 반면 정지이씨나 윤만준 사장의 부상을 통해 대북사업 주도권이 현정은 모녀에게 분명히 있음을 확실히 알리려는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팽배하다.
한편 정지이씨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북사업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이씨는 지난해 4월 ‘정몽헌 회장 추모카페’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혼이 서려있고 이토록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이뤄진 현대그룹에 강한 자부심을 갖는다”는 내용의 글을 올려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현대그룹은 계열사들의 시스템을 통합하기 위해 전문 IT기업인 ‘현대 U&I’를 최근 설립했다. 대표이사 사장엔 최용묵 현대그룹 경영전략팀 사장이 선임됐으며 지이씨가 이사로 등재돼 주목을 받았다. 현대가 이 내용을 발표한 것은 현 회장이 지이씨를 데리고 방북하기 하루 전날의 일이다. 재계에선 그룹 전반을 꿰뚫고 있는 최용묵 사장에게 현대U&I 대표이사를 겸임시켜 지이씨의 경영수업을 본격화하려는 포석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