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민’ 이찬유, ‘종석’ 심현서, ‘철이’ 최현진…나이와 연차 넘어선 ‘성인 이상’ 존재감에 눈길
지난 4월 22일 12부 전편이 공개된 '돼지의 왕'은 영화 '부산행' '반도' '방법:재차의'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괴이' 등으로 자신만의 유니버스를 개척한 연상호 감독의 동명의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다. 20년 전 중학교 시절 친구로부터의 메시지와 함께 시작된 의문의 연쇄살인으로 인해 '폭력의 기억'을 꺼내게 된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스릴러 드라마로 현재 배경의 성인 캐릭터들이 과거의 행적을 떠올려 가며 숨겨진 진실을 찾아가는 것을 작품의 큰 줄기로 삼고 있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고, 또 후반부로 갈수록 과거 사건의 비중이 커지는 만큼 이 작품은 아역 배우들의 연기력과 존재감이 특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는 주연인 황경민, 정종석, 김철 등 3인방 뿐 아니라 이들을 괴롭힌 가해자 강민, 안정희, 박찬영 캐릭터에 모두 적용된다. 다행히 제작진들의 섬세한 캐스팅을 통해 성장한 어른과 과거 속 소년들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큼 서로 비슷한 분위기의 배우들로 채워졌다. 여기에 원작 애니메이션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장르물 드라마에 적합한 각색까지 이뤄지면서 이들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들 역시 "원작 이상의 존재감을 보여줬다"는 호평을 들었다.
과거 지독한 학교폭력 피해자이자 어느 날 우연한 기회로 그날의 트라우마를 기억하게 되면서 가해자들에 대한 응징에 나선 연쇄살인마 황경민 역에는 배우 김동욱과 아역 이찬유(15)가 각각 분했다.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가장 극명하게 달라지는 캐릭터이자 극을 이끌어 가는 주역인만큼, 이 작품에서는 어린 경민이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트라우마를 마주하게 되기까지의 스토리와 캐릭터 빌드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쌓아올린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던져버리더라도 복수할 수밖에 없는 어른 경민에게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이 과거 속 어린 경민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따라가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인 배우들이 해내기에도 어려운 일을 이찬유는 그다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성공시켰다. 이찬유가 맡은 어린 경민은 학교와 집에서 벌어지는 폭력에 그저 순응할 수밖에 없어 얼핏 보면 무기력한 캐릭터로 비춰진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아닌 친구를 위해서라면 그 분노를 폭발시키는 데 망설이지 않는, 자신만의 정의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한없이 무해하면서도 슬픔을 간직한 눈빛으로 고통을 감내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을 매개로 발화하면서 마침내 제 안의 또 다른 폭력성을 이끌어내는 경민의 서사는 이찬유가 단단하게 중심을 잡지 않았다면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력한 피해자와 적극적인 복수자라는 상반된 두 얼굴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로서 완벽하게 제 몫을 해낸 셈이다.
그런 경민과 양극점에서 대치하는 절친 종석 역에는 배우 김성규와 아역 심현서(15)가 열연했다. 뮤지컬 팬들에게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그는 2017년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로 데뷔해 2018년부터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보여왔다. 특히 이번 '돼지의 왕'에서는 스스로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종석으로 분해 왜곡된 정의에 갇힌 위험한 소년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찬유의 경민이 하나의 기점에서 변모한다면 심현서의 종석은 점점 어두워지는 극의 분위기에 미묘하게 물들면서 천천히 흑화하는 대기만성형(?) 빌런으로의 역할을 해낸다. 특히 철이가 '신'에서 보통의 소년으로 내려오는 순간과 맞물려 보통의 소년에서 '괴물'로 부화하게 된 종석의 모습은 아역임에도 성인 시청자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타의에 의해 신이 돼 버린 철이는 주연 중 유일하게 성인 배우 없이 아역만이 담당한 캐릭터다. 성인이 된 경민·종석의 환상과 과거 회상 신에서만 존재하는 만큼 다른 캐릭터에 비해 조금 더 과장되고 비현실적인 면모가 돋보여야 하는 어려운 인물상이기도 하다. 폭력의 고통 아래 있는 두 친구들에겐 자신을 구원할 영웅이자 더 나아가 핍박받는 모든 피해자들의 신이면서, 동시에 소중한 친구라는 여러 얼굴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가이드 해 줄 성인 없이 홀로 연기해야 하는 아역에겐 더욱 난관처럼 느껴졌을 터다.
그럼에도 최현진(14)은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철이'를 만들어 냈다. '돼지의 왕' 전편이 공개된 후 모든 아역들의 연기에 호평이 쏟아진 가운데 특히 최현진에게 많은 스포트라이트가 더해진 것도 캐릭터의 특수성에 그의 존재감이 상상 이상의 시너지 효과를 낸 덕이었다. 영웅과 신의 얼굴을 한 채로 그들의 말을 입에 담다가도, 어머니를 위해 평범한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그 나이 또래의 얼굴과 말투로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는 이 아역배우를 보고 있자면 더욱 넓어질 그의 연기 스펙트럼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어려운 감정 연기부터 강도 높은 액션까지 제대로 해내며 또래 연기자들보다 먼저 난관을 넘어선 최현진이 출연할 차기작엔 대중들이 인정하는 신용도가 붙게 된 셈이다.
한편, 이처럼 완벽한 아역 배우들의 연기에는 그들로 하여금 마음껏 잠재능력을 보여줄 수 있게 해주는 제작 환경이 있었다. 아역들의 비중이 크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강도 높은 폭력을 다루는 만큼 '돼지의 왕' 제작진은 무엇보다 이들의 심리 케어에 중점을 뒀다. 촬영 전후는 물론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현장에 늘 심리 상담사를 상주시키고 주·조연을 막론한 모든 아역 배우들과 그들의 부모님을 대상으로 다각적인 면담을 진행했다. 촬영장에 상담실을 설치해 아역 배우들의 정신건강을 관리한 것은 국내에선 '돼지의 왕'이 최초 사례인 것으로 알려졌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