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다 읽어, ‘환생한 것 같다’는 말 뿌듯…KBS 사극도 해봤는데 뭘 못하겠나 자신감”
“저도 이제까지 나온 다른 이방원들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저희 작품은 기존과는 시작점 자체가 달랐죠. 이건 시점 자체가 이방원이 바라보는 세상이니까요. 게다가 저희는 아예 ‘우린 가족 드라마다’ 이러고 시작한 거거든요(웃음). 가문의 유일한 문과 출신의 막내아들로 시작해서 후에 세종의 아버지로 마무리되는, 그런 모습에서 차별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어요. 잘 끝난다면 시청자 분들도 ‘기존에 봤던 이방원과 많이 다르구나’라고 봐주시지 않을까 싶었고요. 한편으로 저는 전작 이방원들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럴 생각 자체도 없었고요(웃음).”
5월 1일 11.5%(전국 기준)의 시청률로 막을 내린 ‘태종 이방원’에서 주상욱은 그의 말대로 ‘문과 출신 막둥이’부터 철혈군주 태종, 그리고 피 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후회하는 상왕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대중들이 보지 못했던 이방원의 인생과 인간상을 세밀하게 표현해 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킬(Kill)방원’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붓보다 칼을 쥐는 것이 익숙했던 무인 이방원이 아니라 문인으로서의 면이 두드러진 점이 후일 이방원이 태종으로 자리하기까지의 변모에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줬다는 게 시청자들의 평가였다. 다만 이처럼 낯선 ‘최약체’ 이방원을 표현하는 것이 배우 본인에게도, 제작진에게도 첫 번째이자 가장 큰 난관이었다는 게 주상욱의 이야기다.
“시작부터 부담이었죠. 첫 신, 첫 촬영 날부터요(웃음). 초반에 이방원의 캐릭터가 살짝 애매한 게 있었잖아요? 이방원은 이방원인데 젊고 문과 느낌이죠. 그런 걸 한 번도 묘사한 적이 없었으니 시청자들은 좀 어색하셨을 것 같아요. 이방원이면 칼 들고 다 죽여야 하는데(웃음). 지금까지 봐 왔던 대하드라마에 익숙한 이미지가 있다 보니 시청자들도 그렇고 제작진들도 새로운 뭔가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을 거예요. 저 역시 시작할 땐 많이 막막했는데 점점 찍으면서 ‘괜찮을 것 같은데?’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지막에는 ‘내가 왕이지 뭐!’ 이런 마음도 들고(웃음). 사실 KBS도 초반에 걱정이 많았었는데 몇 달 촬영하고 나니까 ‘이 정도면 됐다’(웃음) 하시더라고요.”
처음 주상욱이 이방원을 맡는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시청자들이 우려했던 점은 그가 사극을 하기엔 너무 현대적인 이미지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슈트를 빼 입은 ‘실장님’이란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보니 주상욱의 사극을 도저히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 그런 그가 태종 이방원을 선택한 것도, 또 그를 제작진들이 선택한 것도 양측 모두에겐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실장님도 참 오래된 얘기네요, 오히려 기억해주시면 그게 다행이죠(웃음). 사실 옛날엔 그런 (이미지가 고착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과거 이미지를 지우려고 새로운 역할을 도전했다, 이런 건 없고요. 그냥 포스터에 딱 이방원이 있는데 그걸 내가 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 아닌가? 그렇게만 생각했죠(웃음). 게다가 KBS에서 오랜만에 대하 사극을 하는 건데 거기서 내가 또 그 이방원을 한다니, 너무 영광인 거죠(웃음).”
첫 방송 이후의 반응은 그런 우려를 딛고 모험을 강행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냈다. KBS의 정통 사극을 좋아하는 5060 고정 시청자들은 물론이고 2030 젊은 세대들이 많이 이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새로운 ‘태종 이방원’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특히 젊은 이방원이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의 쿠데타에 휩쓸리면서 겪는 일을 ‘아빠 쿠데타로 직장 내 따돌림 당하는 K-직장인의 애환’으로 묶어 올린 유머 게시 글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이슈였다고.
“저는 댓글을 정말 다 봐요. 악플부터 마침표 하나까지(웃음). 그런데 정말 너무 좋은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그런 걸 들으면 진짜 힘이 나죠. ‘만약 이방원이 살아 있다면 저게 이방원인 것 같다’, 역사적인 인물을 연기하는데 ‘환생한 것 같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잘 표현하고 있다는 뿌듯함도 느껴요.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방원의 직장생활’이라는 글이 올라온 걸 봤는데 진짜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하나, 대단하다 싶었어요(웃음). KBS 대하사극을 보고 누가 이런 유머가 나올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어요? KBS 사극 또 하자고 해주시면 저는 또 하고 싶어요(웃음).”
그렇게 출연진부터 제작진, 그리고 시청자까지 모두 만족시키며 시청률의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던 ‘태종 이방원’은 예기치 못한 논란에 휘말리며 폐지 여론까지 맞닥뜨렸다. 2022년 1월, 극 중 낙마 신을 촬영하다가 스턴트맨이 부상을 입고 말은 사망하는 사건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사극에 쓰이는 동물들이 제대로 된 안전 계약 없이 크고 작은 부상부터 종국엔 사망에까지 이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폭로들도 연이어 터져 나왔다.
결국 ‘태종 이방원’은 한 달 동안 방영을 중단했고, 방송사인 KBS가 동물자유연대와 면담을 통해 촬영장 동물 복지를 위한 가이드라인 마련을 약속하면서 겨우 사태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최고 상승곡선의 정점에서 그 사건이 터졌죠. 그때 올림픽과도 기간이 겹쳐서 한 달 정도 방송을 못하고 있었는데 내부적으로는 엄청나게 (큰 일이) 됐던 걸로 알고 있어요. 물론 지금도 대책 마련을 위해서 힘쓰고 있고요. 저 역시 주연이기에 ‘나랑 상관없어’ 이럴 순 없는 부분이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제가 또 어떻게 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마음고생을 참 많이 했었어요. 다행히 이렇게 잘 마무리된 것에 너무 감사할 뿐이죠.”
부침을 겪고도 완주한 ‘태종 이방원’은 5년 공백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완벽한 KBS 사극’의 귀환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주상욱이라는 배우에게 ‘사극이 가능한 배우’라는 새로운 브랜드를 더한 만큼 그에게 이 작품은 단순한 출연작 그 이상의 의미이기도 했다. 아직 이르지만 2022년 KBS 연기대상의 수상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 만큼 방송사와 배우 모두에게 깊은 족적으로 남을 만한 작품임은 확실해 보인다.
“‘태종 이방원’에서 젊었을 때부터 나이 들었을 때까지, 이런 상황부터 저런 상황, 이런 감정 저런 감정 연기를 그 어떤 작품보다도 많이 한 것 같아요. 그런 걸 거치다 보니 연기에 자신감이 생기게 됐고 두려울 게 없어졌죠. ‘이제 나는 뭘 해도 잘해낼 수 있을 것 같다. KBS 사극을 했는데 어디 가서 뭘 못 하겠나!’ 하는(웃음). 연기적으로도 성숙해진 것 같아 ‘태종 이방원’이 제 인생에 큰 작품으로 남을 것 같아요. 어떤 터닝 포인트가 됐다곤 할 수 없지만,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지 않을까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