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말의 희망’ 꺼지자 벌떼공격 개시
지난 7월21일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가 하이트맥주의 진로 인수에 대한 사전심사를 허용해 주자 그간 ‘설마’ 하며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추이를 지켜보던 소주·맥주 업체들에 비상이 걸렸다. 하이트맥주와 진로가 주류시장을 평정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됐기 때문이다. 처음엔 다소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경쟁업체들은 이제 실현가능한 대응책을 찾기 시작했다.
공정위의 결정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곳은 OB맥주. 소주시장의 경우는 지방색이 강하지만, 맥주의 경우 순식간에 순위가 뒤집힐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OB맥주는 공정위의 결정 직전에 김준영 사장이 직접 기자간담회를 자청해 하이트맥주의 진로 인수 불가 의견을 피력했는가 하면 21일 오전 공정위의 발표가 있자마자 오후에 반박문을 담은 보도자료를 돌렸다. 또 영업사원을 통해 주류도매상 1천3백 곳에 직접 편지를 돌리며 하이트맥주를 견제하기 위해 OB맥주에 힘을 실어줄 것을 부탁하는 등 자사에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고 있다.
동시에 법률적 검토를 시작했다. 이미 지난 2002년에 경남지역 소주사인 무학이 공정위 결정에 불복해 법원의 해석을 요구한 것처럼 공정위 결정의 허점을 법정에서 조목조목 밝힐 기회가 아직 남았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 무학은 공정위의 결정에 불복하며 법원에 ‘시정조치명령 등 처분 취소청구소송’을 냈으나 패소한 바 있다. “무학과 대선주조가 합병하면 부산, 경남지역 소주시장의 92%를 차지하게 돼 가격 담합 인상 같은 부당행위가 예상된다”는 것이 법원이 밝힌 이유였다.
OB맥주측은 “공정위의 최근 결정은 ‘소주·맥주시장의 혼합결합으로 경쟁이 실질적으로 제한될 우려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기업결합을 허용한 것이 모순이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기업결합에 따른 효율성과 독과점 가능성을 비교해본 결과 효율성 측면이 더 높아 허용한 것이다. 경쟁제한성은 시정조치를 통해 해소될 것으로 보았다”며 결정 이유를 밝히고 있다.
OB맥주측에 따르면 하이트맥주·진로 결합 후 5년간 가격인상을 소비자물가 수준으로 제한한 시정조치는 시장상황을 거꾸로 해석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두업체가 가격을 안 올리는데 어떻게 경쟁업체가 가격을 올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군소업체가 가격을 인상하지 못해 경영난에 처하게 되고 경쟁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더 많다고 한다.
하이트맥주가 결합 후 부당거래를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을 스스로 마련하라는 것에 대해서도 “우범자의 범죄 예방은 경찰이 해야 되는데 우범자에게 범죄예방책을 제시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반응까지 내놓고 있다.
하이트맥주·진로 영업조직 분리에 대해서는 “주류는 제조와 유통의 겸업이 금지된 특이한 구조이기는 하지만, 주류도매상이 모든 주류를 한꺼번에 취급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업조직을 분리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소주와 맥주의 공급량 조절을 통해 얼마든지 끼워팔기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OB맥주는 민사소송과 더불어 헌법소원까지 검토중이다. “공정위 결정이 공정 거래를 보장하려는 헌법정신에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 OB맥주의 주장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겠다는 것이다.
한편 지방 소주사들도 구체적 방안을 찾고 있다. 경남지역 소주사인 무학은 인수합병과 관련해 공정위의 불공정한 잣대를 문제삼고 있다. 무학측은 “우리는 이중으로 차별받고 있다. 우리가 대선주조를 인수하려고 했을 당시 공정위는 부산·경남을 하나의 시장으로 보고 점유율 92%가 넘게 돼 독과점으로 보았다. 그런데 지금 전북지역의 경우 현재 하이트맥주의 계열사인 하이트주조가 43%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고, 진로의 전북지역 점유율 50%를 합하면 93%나 되는데 하이트주조 매각 등의 조치가 빠진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학측은 공정위에 질의서를 보낸 뒤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 공정위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광주·전남지역 소주사인 보해는 “소주는 지방색이 강해 진로가 쉽게 진입하기 힘들 것”이라며 영업·마케팅 부문의 강화를 위해 극기훈련과 단합대회를 통해 벌써부터 ‘텃밭 지키기’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 광주·전남의 맥주시장에서는 하이트맥주가 점유율 60%, 소주시장에서는 보해가 80%로 선두를 지키고 있다.
그러면서도 보해측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방경제 살리기에 힘쓰고 있는 마당에 공정위가 지방의 소주 회사들을 죽이고 수도권 업체를 밀어주는 결론을 내린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지방 소주사들은 회사 대표들끼리 계속 연락을 취하고 있어 필요시에는 언제든지 연합전선을 펼쳐 대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
한편 주류도매상들은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결합으로 이들 기업체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한 도매상 관계자는 “경쟁사 제품의 점유율이 비슷할 경우에는 도매상의 입김이 커지지만 하이트맥주와 진로가 한몸으로 움직이게 되면 물량 떠넘기기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생길 것이다. 그렇다고 불만을 표시하면 ‘머스트스톡(must stock: 영업에 필요한 최소 공급량)’까지 줄여버릴까봐 드러내놓고 말하지도 못한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한편 하이트맥주측은 “공정위의 시정조치대로 5년간 하이트맥주와 진로의 영업망을 분리해 운영하고, 부당하게 거래를 유인·강제하지 않는 방안을 제출할 예정이기 때문에 문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