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옵션 없이는 항공료도 안 나오는 구조…‘소비자가 찾는다지만…’ 덤핑경쟁 부작용 우려
#홈쇼핑도 399
초반엔 비즈니스 클래스 등을 넣은 고가 상품 위주로 상품을 구성했던 홈쇼핑에서도 여행업계가 문을 활짝 열기 시작하자 초저가 여행 상품 판매가 눈에 띄게 늘었다. 특히 베트남 입국 조건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완화되면서 동남아시아 국가 가운데 베트남을 중심으로 초저가 상품이 출현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3월 15일부터 백신 접종 여부와 관계없이 무사증 입국을 허용했으며 4월 25일부터는 여행자 보험 가입 의무를 없앴고, 5월 15일부터는 입국 시 코로나19 검사 음성확인서 제출 의무까지 폐지했다. 베트남으로 가는 항공편의 급격한 공급 증가도 베트남 초저가 상품 출현의 주요 원인이다.
대형 여행사를 비롯해 중소형 여행사들까지 앞다퉈 베트남 저가 패키지에 열을 올리는 이유는 단순하다. 이제 막 시장이 열려 고객을 선점해야 하는 데다 코로나19 전 한국인이 많이 가는 해외 여행지 3위로 꼽혔던 지역인 만큼 앞뒤 안 가리고 일단 수요부터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정작 여행 상품의 가격 형성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는 잘 모른다. 국제선 항공편이 아직 코로나19 이전처럼 회복되지 못한 데다 유가 급등으로 유류할증료까지 올라서 항공료는 이전보다 비싸졌다. 현지 인프라도 예전만 못하다. 일명 ‘399’나 ‘499’는 겨우 항공료만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럼에도 초저가 상품을 선택하는 소비자들은 대형 여행사 이름만 믿고 여행 상품을 선택한다. 실제로 모두투어, 노랑풍선, 인터파크투어 등 익숙한 대형 여행사에서도 399와 499 상품을 팔았고 소비자들은 코로나19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상품가에 놀라면서도 여행사 브랜드를 믿고 상품을 구매했다.
하지만 저가 패키지 상품은 어쩔 수 없이 소비자가 현지에서 쇼핑과 옵션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현지 여행사인 랜드사와 가이드가 일정 부분 소비자가 부담해야 할 여행 경비를 미리 부담하고 고객을 받기 때문이다. 고객이 일정량 이상의 쇼핑과 옵션을 해주지 않으면 랜드사와 가이드는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저가 패키지 상품의 이러한 구조적 문제는 코로나19 이전부터 계속 문제가 돼 왔지만 정작 뚜렷한 변화는 없었다. 계속 저가 상품을 파는 여행사가 있고 이를 구매하는 소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역보다 가격
이는 코로나19가 훑고 지나간 지금도 변함없는 구조적 문제로 남아 있다. 여행사들은 코로나19 이후엔 많은 사람이 모이는 관광형 단체 패키지보다 소규모 휴양형 상품이 대세를 이룰 것으로 전망해왔다. 막상 해외여행이 본격적으로 재개되자 업계는 아직 일부지만 이전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 대형 여행사 관계자는 “베트남과 태국 등은 유럽 상품과 달리 쇼핑과 옵션이 빠지기 힘든 면이 있다. 유럽 쪽은 실제로 그 지역에 가고 싶은 고객이 여행의 가치에 주목해 예약하는 경우가 많지만 동남아는 지역을 먼저 고르기보다는 상품이 싸면 일단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며 “일단 날짜 여유가 길어야 하고 상대적으로 자주 가기 어려운 유럽과 달리 동남아는 가격이 저렴하면 즉흥적으로 여행을 계획하기도 해서 베트남이든 태국이든 필리핀이든 지역 우선이 아닌 가격이 저렴한 상품이 잘 팔린다”고 전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동남아 상품의 경우 노쇼핑·노옵션 99만 원 상품은 잘 안 팔리지만 쇼핑과 옵션이 많이 붙어있어도 39만 원 상품은 잘 팔리는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사실 항공료가 높아진 이 시기에 여행사에서 39만 9000원짜리 상품을 판다는 건 마이너스를 감수하는 것이지만 그 적자를 바로 여행사의 손해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앞서 언급했듯 그 손해는 대부분 현지 여행사와 가이드가 떠안기 때문이다. 초저가 상품의 경우 여행사에서 현지 여행사에 여행 경비를 주지 않고 현지에서 여행객의 쇼핑과 옵션으로 충당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한 여행사는 “최근엔 가이드가 쇼핑과 옵션을 강요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대형 여행사의 경우 여행사에서 나름대로 가이드를 관리하기도 하고 고객 불만이 접수되면 가이드나 가이드가 소속된 현지 여행사와 거래를 끊거나 경고를 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가이드도 여행사의 브랜드를 봐가며 여행객을 대한다”며 “가이드를 관리하는 대형 여행사의 경우엔 초저가 상품이라도 여행객 의지에 따라 쇼핑과 옵션에서 100%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 더구나 요즘은 해외에서 쇼핑한 물건들도 물건에 하자가 있으면 대부분 환불이 가능해 쇼핑으로 사기 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런 덤핑 상품에 매력을 느끼는 소비자도 꽤 많다. 저가 패키지를 많이 이용해본 한 여행객은 “쇼핑이나 옵션을 더 하더라도 여행경비 39만 원을 내고 가면 그만큼 내가 원하는 쇼핑과 옵션을 더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했다.
다른 여행사 관계자는 “마케팅 목적으로 평일 비수기에 ‘299’ ‘399’ 상품을 팔기도 하지만 주말이나 성수기 가격은 같은 상품이라도 799, 899에 판다. 같은 상품이지만 날짜에 따라 가격을 달리 책정하면서 적자를 메우는 식이기 때문에 저가 상품을 산 여행객에게 바로 어떤 압박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이는 같은 날짜의 같은 좌석이라도 사는 시기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항공권 판매와도 같은 방식이다. 항공권의 ‘얼리버드’ 판매 방식이나 ‘1+1’ 프로모션을 예로 들 수 있다. 또 여행 상품의 특성상 많은 사람이 선택할 경우 항공·호텔·차량 등을 보다 싸게 계약할 수 있기 때문에 저가라도 공동구매식의 박리다매 마진이 가능하다고도 했다.
#299‧399 사라질까
여행업계의 저가형 동남아 상품은 여행객 수준이 올라가면서 조금씩 개선될 수는 있지만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고객이 찾는 한 299, 399 상품도 사라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업계 한 전문가는 “여행시장에서 299, 399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사실 스케줄이나 상품의 질이 아닌 가격만 보고 예약하는 고객들의 책임도 크다”며 “옵션과 쇼핑을 감수하고서라도 399로 가겠다는 것은 일종의 조삼모사”라고 말했다.
가격 경쟁으로 인한 덤핑 상품 양산을 우려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현지 인프라가 아직 정비되지 않아 쇼핑센터나 옵션투어 업체가 제대로 문을 열지 않은 상태에선 쇼핑이나 옵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현지에서 여행객의 선택지가 줄어들거나 강요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지 여행사와 가이드의 손에 의해 여행의 질이 결정되는 것은 여행 상품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지만 상품가에 따라 여행의 수준이 불쾌함을 느낄 정도로 떨어진다면 이는 여행업계와 소비자 모두에게 결국 마이너스가 될 수밖에 없다. 한 소비자는 “코로나19가 끝나면 여행 환경이 많이 바뀌면서 싼 패키지가 다 없어질 줄 알았는데 막상 399 상품을 보니 긴가민가하면서도 솔직히 ‘일단 한번 가볼까’ 하는 유혹을 느낀다”고 말했다.
초저가 상품으로 여행을 떠날 경우 고객이 스스로 원하는 현지 특산품 쇼핑이나 해양 레저 등을 자유롭게 할 수도 있지만 가이드의 눈치를 보느라 원치 않는 쇼핑을 일정 부분 해야 하거나 옵션을 일부 강요당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한마디로 여행 자체가 ‘복불복’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초저가 여행상품은 단기적으로는 이제 막 코로나 시국을 벗어나려는 여행사와 항공사의 합작 마케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이런 양상이 지속된다면 코로나19 이전 여행업계가 겪던 고질적인 문제들, 즉 미수로 인한 현지 여행사 파산이나 여행사의 ‘먹튀’ 등이 다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