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이치로 ‘열풍’ 일으켜…카가와·박찬호 짧은 전성기로 아쉬움 남겨
#손흥민과 오타니, 명실상부 월드클래스로
손흥민은 조기 축구유학으로 10대 시절부터 유럽 무대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독일 분데스리가 함부르크에서 프로 경력을 시작, 같은 리그 내 레버쿠젠, 잉글랜드의 토트넘 홋스퍼로 팀을 옮겨갔다.
이전부터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유망주 중 한 명이었던 그는 토트넘에서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이적 직후 다소 어려움을 겪는 듯했지만 두 번째 시즌부터 리그에서 두 자릿수 골을 득점 하는 데 성공했다. 강팀을 상대로도 일정한 활약을 보였고 챔피언스리그 등 큰 무대에서도 능력을 입증했다.
2019-2020시즌부터는 2시즌 연속 10골-10도움 이상을 기록하며 공격 포인트 생산 능력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 손웅정 씨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아직 월드클래스 아니다"라는 발언으로 관심을 모았지만 축구계 안팎의 평가는 점점 올라갔다.
'유럽 평정'에 방점을 찍는 사건은 프리미어리그 득점왕 등극이다. 최근 종료된 2021-2022시즌, 손흥민은 리그 35경기에 출장해 23골을 넣으며 모하메드 살라(이집트)와 공동 득점왕에 올랐다. 23골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페널티킥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 가치를 더했다.
오타니 쇼헤이는 자국리그인 일본프로야구(NPB)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프로 이전 고교 시절부터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고등학교 3학년 당시 일본 아마추어 최초로 시속 160km의 공을 던지며 큰 주목을 받았다. 자연스레 메이저리그에서도 뜨거운 러브콜이 이어졌지만 닛폰햄 파이터즈 유니폼을 입는 선택을 했다.
오타니가 닛폰햄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투타겸업' 허용이었다. 투수와 타자 양쪽에서 모두 재능을 보인 오타니의 욕심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현대 야구에서 사라진 형태로 활약을 이어갔고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2년 차 시즌인 2014년, 투수로 10승과 타자로 10홈런을 기록하며 능력을 증명했다.
2016시즌 NPB 퍼시픽 리그 MVP 수상, 일본시리즈 우승 등 일본 무대를 평정한 그는 2018시즌부터 LA 에인절스 유니폼을 입고 MLB에서 도전을 이어갔다. 이후 이야기는 알려진 대로다. 첫 시즌 신인상을 수상하며 순조롭게 빅리그에 적응했고 리그에서 가장 주목받는 선수가 됐다.
성장을 거듭하던 오타니는 마침내 리그 최정상 자리에 올랐다. 2021시즌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한 것이다. 투표에서 단 한 표도 놓치지 않은 만장일치 MVP이었기에 더 큰 화제가 됐다.
오타니는 2021시즌 투수로 23경기에서 9승 2패 탈삼진 156개 평균자책점 3.18을 기록했다. 타자로는 타율 0.257 46홈런 26도루를 기록했다. 각각 포지션을 놓고 봤을 때 '준수한' 기록이라 할 수 있지만 이를 동시에 해냈기에 보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이처럼 성공적인 투타겸업은 1910년대 베이브 루스 이후 최초였다.
#손흥민 이전의 월드클래스
손흥민 이전, 유럽 축구를 놀라게 했던 아시아인은 차범근이다. 차범근은 1978년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 10여 년간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스포츠계에서 특히 널리 쓰이는 '월드클래스(World-Class)'라는 단어의 원산지 중 한 곳이 분데스리가다. 독일 스포츠잡지 '키커(kicker)는 오랜 세월 동안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선수들에게 일종의 '등급'을 매겨왔다('키커 랑리스테'로 불림). 이 등급 중 최상위에 해당하는 수준이 'WK(월드클래스)'였다. 그 뒤를 IK(인터내셔널클래스), NK(내셔널클래스), B(주목할 만한) 등이 잇는다. 이들의 평가는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한데, 한 시즌을 마쳤지만 아무도 WK에 선정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이처럼 엄격한 키커 랑리스테에서 차범근은 1979-1980시즌 전반기에 WK로 선정된 바 있다. 이후 커리어에서 IK에 4회, NK에 9회 선정됐다. 꾸준히 상위권 기량을 선보였음을 인정받은 것이다. 11시즌간 모든 대회를 통틀어 372경기 121골, UEFA컵 우승 2회라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손흥민·차범근과 함께 언급되는 대한민국의 축구 영웅은 박지성이다. 일본 무대에서 뛰던 박지성은 네덜란드를 거쳐 당대 최고의 팀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성했다. 맨체스터에서 챔피언스리그 1회, 프리미어리그 4회 등 숱한 우승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팀 커리어에서 압도적인 기록을 남겼지만 '박지성이 월드클래스인가'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는 이는 많지 않다. 큰 경기 활약, 팀에 대한 헌신, 개성 있는 플레이스타일로 극찬을 받기도 했으나 팀에 없어선 안 될 핵심선수는 아니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잦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는 기간도 길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뛴 7시즌간 리그 30경기 넘게 출전한 시즌이 이적 직후였던 단 1시즌에 불과하다.
대한민국 외에도 아시아 국가 출신 인물 중 세계적 명성을 떨친 선수들이 존재한다. 차범근처럼 일본에도 키커 랑리스테 WK를 받은 선수가 있다. 미드필더 카가와 신지도 WK에 1회 선정됐다.
카가와 신지는 명문의 부활을 알리던 2010년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열풍의 주인공이다. 최전성기였던 2011-2012시즌에는 43경기에서 17골 10도움을 기록했고 이 시즌 후반기 WK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 같은 맹활약은 오래 가지 못했다. 또 다른 아시아인 박지성이 자리를 비운 맨유로 향했지만 도르트문트 시절만큼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부상이 발목을 잡던 시기도 있었다. 두 시즌을 보낸 이후 친정팀 도르트문트로 복귀했으나 월드클래스 수식어를 달기엔 부족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나카타 히데토시, 나가토모 유토 등도 일본의 축구 영웅으로 손꼽힌다. 나카타는 AS 로마에서 한 시즌 10골을 달성했으나 활약 기간이 길지 않았다. 나가토모는 세계적 명문 인터밀란에서 장기간 맹활약했으나 이 기간 세리에A와 인터밀란이 동시에 하락세를 겪던 시기라 빛이 바랬다.
이외에도 이란의 알리 카리미, 자바드 네쿠남 등이 아시아 출신으로 월드클래스에 근접했던 선수들로 평가받는다. 사우디아라비아도 아시아 축구 강국으로 군림했던 시기가 길지만 사우디 선수들은 유럽 무대로 진출하는 케이스가 많지 않아 검증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오타니 이전의 월드클래스
전 세계 독보적 프로야구 무대로 꼽히는 MLB에는 명예의 전당이라는 월드클래스 '판독기'가 있다. 미국 각 스포츠 종목에서 명예의 전당 입성 기준은 각기 다른데, 야구는 특히 그 기준이 까다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애석하게도 아시아인으로서 아직 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린 이는 없다. 하지만 향후 입성이 유력한 인물은 있다. '타격 기계' 스즈키 이치로는 입성 난이도가 높은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것으로 확실시되는 유일한 아시아인으로 꼽힌다.
이치로의 MLB 등장은 그야말로 선풍적이었다. 데뷔 시즌부터 타율 0.350 242안타 8홈런 56도루를 기록, 신인상과 MVP를 동시에 석권했다. 이후 10년 연속 3할 타율, 한 시즌 200안타 등 다수의 뛰어난 기록을 남겼다.
이치로 돌풍은 단순 '좋은 성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치로가 미국 무대에 발을 디딘 2000년대 초반은 '거포'들이 득세하던 시대였다. 일부 선수들은 더 많은 장타를 위해 약물을 투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치로는 트렌드와 반대 성향의 타자였다. 정교한 타격으로도 좋은 기록을 낼 수 있음을 증명하며 패러다임을 바꿨다. 미국프로농구(NBA)로 무대를 옮긴다면 '센터 농구'가 득세하던 시기의 마이클 조던, '3점슛 시대'를 이끈 스테판 커리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이치로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다수의 MLB 선배들이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보유하고 있는 것과 달리 우승 경력이 없음에도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실시되고 있다.
아시아인이 '장타'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는 마쓰이 히데키였다. 마쓰이는 2003년 뉴욕 양키스로 이적, 2004시즌에는 31홈런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 30홈런을 넘긴 타자로 남았다. 하지만 이치로나 오타니와 같은 임팩트 있는 활약을 남기지는 못하며 '준수한 선수'로 남았다.
아시아 투수의 가능성을 선보인 이는 노모 히데오다. 노모는 데뷔 시즌부터 센세이셔널한 활약으로 미국 무대를 놀라게 했다. 1995시즌 28경기에서 13승 6패 평균자책점 2.54 탈삼진 236개로 신인상, 탈삼진 1위를 기록했다. 그 해 열린 올스타전에서 선발투수로 나서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노모와 동시대에 활약하며 '한국인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인물은 '코리안 특급' 박찬호다. 미국 무대에서 더 일찍 두각을 드러낸 이는 노모였지만 박찬호는 노모보다 더 오랜 기간 많은 경기에 나서며 실력을 입증했다.
박찬호는 LA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활약하던 1990년대 말부터 2001년까지 마지막 5년간 평균 15승, 3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던 뛰어난 투수였다. 2000시즌에는 18승(5위) 탈삼진 217개(2위)로 리그 수위급 활약을 펼치며 사이영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하지만 전성기는 지속되지 못했다. 이후 부상이 그를 괴롭혔고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이후에는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선발 보직을 내려놓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같은 시기 MLB에서 경쟁을 이어가던 노모와 박찬호는 은퇴 뒤 유사한 평가를 받는다. 리그 수위급 활약을 떨쳤지만 전설적인 선수들에 비해 그 기간이 길지 않았다. 다만 아시아인으로서 빅리그에 진출해 가능성 이상을 증명했다는 점만큼은 충분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 다른 아시아의 야구 강국 대만도 월드클래스에 근접한 투수를 배출했다. 2000년 미국 무대로 진출한 왕첸밍은 2000년대 중반 명문 뉴욕 양키스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했다.
2005년부터 빅리그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2006년 19승 6패 평균자책점 3.63이라는 압도적 성적을 냈다. 사이영상 후보에서도 2위에 오르며 당시로선 아시아 최고 순위를 기록했고 단일 시즌 아시아 투수 최다승 등 다수의 기록을 갈아치웠다.
하지만 왕첸밍 역시 전성기가 길지 못했다. 2007년에도 19승을 올리는 등 양키스 에이스로 활약했으나 2008시즌 부상으로 내리막을 걸었다. 이후 워싱턴, 토론토 등에서 부활을 노렸지만 이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