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파 겪은 미혼모 역할 “때마침 상한 머릿결 그대로 살렸죠”…30대 접어든 그의 다음 스텝은 코미디 영화 ‘드림’
“제 수상 불발은 전혀 아쉬움이 없었습니다(웃음). 사실 저희 영화가 (칸에서) 상영된 뒤 그 다음날 관계자 분들이 저희한테 평론가, 관객 분들 후기가 좋다고 얘기해주셨는데 저는 그것도 안 믿었어요. 관계자 분들이니까 좋은 말씀 해주시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간 있을 때 번역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아서 후기 기사를 찾아봤더니 진짜 그런 평들이 있더라고요! 정말 많은, 훌륭한 작품들이 출품 됐는데 그 와중에 제 연기를 인상 깊게 봐주신 분들이 계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했어요.”
6월 8일 국내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 ‘브로커’는 작품 자체로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지언정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에는 이견이 없었다. 송강호, 강동원, 배두나, 이주영, 이지은이 함께한 이 작품은 베이비 박스에 남겨진 아기들의 입양처를 찾아 돈을 받고 넘겨주는 불법 입양 브로커와 아기를 찾으러 온 엄마의 로드 무비를 그린다. 이지은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아기를 베이비 박스에 놔두고 갔다가 다시 찾으러 온 엄마 소영 역을 맡았다.
“감독님께서 따로 주신 소영이의 인터뷰지가 있었어요. 그 안엔 대본보다 훨씬 소영이의 어둡고 힘든 면모가 많았는데 그걸 보며 ‘나보다 짧은 인생에서 많은 일을 겪은 사람을 내가 잘,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소영이는 자신에게 연민을 줄 여유조차 없는 삶을 살았고 저는 그게 너무 안쓰러웠어요. 소영이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는 건 제게 참 어려운 질문인 것 같아요. 제가 살아보지 않은 삶이기에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아주 단순하게 힘내라, 응원한다 그런 말 자체를 제가 할 자격이 있는지 싶어요.”
그의 말대로 극 중에서 소영은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보통 사람은 하나만 겪어도 힘들 인생 풍파를 종류 별로 겪은 인물이다. 앳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회의 손때가 묻어 한없이 지쳐 있고 자그마한 것에도 분노를 품는 눈빛은 그의 인생이 순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없이 보여준다. 제대로 관리조차 하지 못해 제멋대로 자란 머리카락과 지친 눈매를 더 어둡게 만드는 메이크업도 그런 소영의 전사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만들고 있다. 이지은은 소영의 이런 모습을 만들어내는 데 어느 정도 우연이 겹쳤다고 설명했다.
“크랭크 업 당시가 제가 ‘LILAC’(정규 5집) 앨범 활동을 막 끝내던 때였는데 그래서 제 머릿결이 정말 많이 상해 있었어요(웃음). 그러다가 그 결을 다 살려서 가는 게 어떨까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죠. 진짜 운이 좋게 머리 기장이 아주 길었는데 게다가 탈색모였던 터라 빗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주 지저분했거든요. 그 푸석푸석 머리를 다 살려서 갔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드린 기억이 나요(웃음).”
삶으로부터 매질 당하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던 소영을 보고 있자면 이지은의 주연작이었던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 속 이지안이 떠오른다. 실제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이지은을 캐스팅하게 된 계기로 ‘나의 아저씨’를 꼽았다. 그는 “‘나의 아저씨’를 보고 이지은에게 홀딱 반했다. (그것이) 이지은 캐스팅 이유의 전부다. 훌륭했다”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안은 삶에 다소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 반면, 소영은 언제든지 ‘반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저도 지안이와 소영이는 결이 비슷한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가장 큰 차이가 지안은 표현을 거의 안 하는 인물이지만 소영은 자기 안에 닿으면 참지 않는 인물이라는 거였어요. 사실 감독님도 ‘나의 아저씨’를 보시고 저를 캐스팅했으니 지안이에게서 가져올 수 있는 부분, 소영과 결이 비슷한 부분은 가져오려 노력을 많이 했죠. 다만 너무나도 극명하게 다른 부분도 있어서 거기서는 제가 그동안 안 보여드렸던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지점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직설적으로 바로 표현하고 뭔가 느꼈을 때 바로 드러내려는 것 같은 거요.”
실제로 소영을 연기하며 이지은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을 관객들 앞에 하나씩 펼쳐 놨다. 입양 브로커를 쫓는 형사 수진(배두나 분)과 모성에 대해 설전을 벌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 버리는 것보다, 낳기 전에 죽이는 게 죄가 더 가벼워?”라며 악에 받쳐 내뱉거나 입양 흥정을 벌이려는 부부에게 걸쭉한 욕을 뱉는 것도 새로운 이지은의 모습이었다. 특히 욕 대사를 두고 혹시나 어색할 것이 우려돼 부모님과 매니저 앞에서 연습을 거듭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다들 보시고 ‘오, 진짜 욕 하는 거 같아! 나 지금 약간 무서웠어!’ 하시면서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기도 했어요. 원래 대본엔 일본식 욕이 적혀있었는데 ‘당신이 이랬잖아’ ‘바보 같은!’ 이런 식의 번역체였거든요(웃음). 아무래도 소영이가 나이가 어리다 보니 좀 더 직설적으로 연령대가 낮은 친구가 할 만한 욕을 생각해봐도 되겠냐고 말씀드려서 조금씩 바꿔나갔어요. 또 수진과의 신에서 그 대사는, 영화의 주제가 아닌 소영 개인의 가치관이 담긴 대사였기에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어요. 영화의 주제였다면 제가 인간으로서 생각하는 신념과 다른 지점에 있어 이 영화에 참여하는 데 고민이 많아졌을 것 같거든요.”
상업영화 데뷔를 무사히 마쳤으면 이제 다음 스텝으로 나갈 차례다. 배우 이지은으로서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과 함께 한 코미디 영화 ‘드림’의 공개를 앞두고 있고, 가수 아이유로서는 앨범 활동 외에도 다양한 소통 창구를 통해 대중들과 함께할 계획이다. 올해로 30대를 맞이하게 된 그는 ‘계획 없는 삶’에 한 걸음 발을 들이밀게 됐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일 욕심도 버리지 못했다고 했다. 그건 타고 난 천성이나 다름없다고.
“어린 나이에 데뷔해서 그런지 이지은과 아이유를 분리하지 않고 사는 것 같아요. 평상시 생활할 땐 그런 분리감이 확실했는데 어느 순간 일을 할 때도 이지은을 사용하다 보니 크게 분리가 안 되더라고요. 저는 배우로도 가수로도 굉장히 욕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일 욕심이 타고 난 것 같고, 또 일복도 타고 난 것 같아요(웃음). 그래서 계속 일해야 하는 사람이지 않을까요? 다만 개인으로서의 저는 노력하는 사람이고 머쓱함이 많은 사람입니다(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