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느 박’이 만든 가장 ‘사적인 영화’…“박해일은 투명한 변태, 탕웨이 한국말 연기에 탄복”
5월 28일 폐막한 제75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박찬욱 감독(59)은 “황금종려상을 기대하진 않았나”라는 질문에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자신의 수상 때보다 배우 송강호의 남우주연상 수상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그는 2004년 ‘올드보이’의 심사위원대상을 시작으로 2009년 ‘박쥐’(심사위원상)에 이어 세 번째 칸 영화제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국인으로서 칸 최다 수상자로 기록된 박 감독에겐 ‘깐느(칸) 박’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칸 경쟁부문에 작품이 노미네이트돼도) 수상을 못한 적도 있었죠. 저는 사실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주변인들이 섭섭해 하니까 왠지 제가 죄 진 것 같고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좋진 않더라고요(웃음). 너무 흔해빠진 이야기라 하나마나할 것 같은데, 저는 경쟁에서 영화로 상을 받아도 그만큼 좋지도, 슬프지도 않아요. 이게 뭐 그렇게까지 경쟁 붙여서 상을 주고, 안 받고 하는 게 가치 있는 일인가. 그래도 제게 이 작품이 어떤 의미로 남느냐는 질문을 들으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배우예요. 저에게 이 작품은 박해일과 탕웨이와 함께한 영화다. 앞으로도 그렇게 떠올리겠죠.”
그에게 감독상의 영광을 안긴 영화 ‘헤어질 결심’은 공개 이후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마스터피스”라는 극찬을 받으며 국내외 시네필들을 현혹 아닌 매혹하는 중이다. 2005년 ‘친절한 금자씨’부터 박찬욱 감독과 협업해 온 시나리오 작가 정서경과 함께한 다섯 번째 작품이기도 한 ‘헤어질 결심’의 제작 계기에 대해 박 감독은 “그냥 영화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영국에서 ‘리틀 드러머 걸’이라는 작품을 하고 있던 중이었어요. 다음 작품은 무조건 한국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한국에서 만든 한국말을 하는, 그리고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영화요. 그리고 사회적인 이야기나 뭔가에 대한 메시지가 없는 그냥 영화 그 자체,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형식으로 짜인 가장 순수한 형태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런던에서 ‘리틀 드러머 걸’ 후반 작업 중에 정서경 작가가 여행을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얼른 붙들어 앉혀 놓고 영화 좀 하나 써 보자고 닦달해서 기획하게 됐죠(웃음).”
‘헤어질 결심’은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있던 형사 해준(박해일 분)이 산에서 발생한 변사 사건을 수사하던 중, 사망자의 젊고 아름다운 중국인 아내이자 동시에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서래(탕웨이 분)에게 의심과 관심을 갖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어른이기에 더 충동적일 수 있고, 더 맹목적일 수 있는 그런 모순을 박찬욱의 색채로, 박해일과 탕웨이에 덧씌운다.
“너무 이기적이거나 세속적이거나, 경박하다는 걸 사람들이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는 시대예요. 그런 면에서 해준은 멸종 동물처럼 보기 드문 기품을 가진 사람이죠. 그런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런 기품을 ‘뿜뿜’하면서 자랑하다 끝나는 영화는 재미없잖아요. 그런 사람이 어떻게 붕괴되느냐, 그런 품위를 어떻게 잃어버리느냐, 잃어버리는 과정을 고통스러워하느냐, 품위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인지하는 사람만이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으니 얼마나 부끄럽게 여기겠느냐, 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특히 이 작품에서 박해일이 박 감독과 처음으로 함께한다는 점에서 제작 소식이 들려온 초기부터 국내 영화인들의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봉준호와 박찬욱, ‘칸이 선택한’ 두 한국인 감독들이 박해일을 각각 어떤 채도와 명도로 그려낼지 호기심이 들 수밖에 없는 대비였다. ‘살인의 추억’(2003)과 ‘괴물’(2006)에서 박해일의 모습을 먼저 그려냈던 봉준호는 그를 향해 “비누 냄새 나는 변태”로 정의한 바 있다. 반면 박 감독은 “변태는 맞지만 진정한 변태는 아니다”라고 급(?)을 나눴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꼿꼿하고 단정한 해준에게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박해일 씨는 다 들여다보이는 사람인 것 같아요. 투명해요. 꿍꿍이가 없고 감출 것이 없는 사람. 그래서 그 영혼이 얼마나 맑은지 잘 알 수 있죠. 그러면서도 박해일 씨를 변태라고 하는 이유는 생각이 좀 엉뚱하고, 나름대로 상투적인 생각을 추종하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래요. 밥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되게 독특한 의견을 밝힐 때가 많은데 그걸 또 숨기지도 않아요(웃음). 다만 진정한 변태들은 다 감추는데 이 사람은 다 드러나 있기 때문에 진정한 변태는 아니에요. 그런 모습이 해준에게서 보였다고 생각해요.”
감정을 향해 직진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모호한 그림자를 감춘 서래 역의 탕웨이는 그야말로 그린 듯한 캐릭터 자체였다. 외국 배우들과 작업을 종종 진행해 왔지만 박 감독은 탕웨이의 연기에 대한 열정에 새롭게 놀랐다고 말했다. 정말 서래가 되기 위해 앵무새처럼 암기한 한국어 대사를 읊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미묘한 감정과 톤, 목소리의 짙고 옅은 농도까지 조절하기 위해 몰두하는 데에 자신도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고.
“탕웨이 씨가 연기한 서래는 자신과 살을 맞붙었던 사람이 죽어도 큰 감정의 동요가 없죠. 인생은 그런 것이고, 자연은 그렇게 굴러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싸구려 감상에 빠지지 않는 인간인 거예요. 현실을 똑바로 볼 줄 아는 서래의 그런 면이 잘 표현된 대사가 변사 사건 사진이 잔뜩 붙어있는 해준의 집 벽을 보며 ‘개미가 사람을 먹어요?’ 하는 대사인데, 그걸 촬영할 때 탕웨이 씨의 해석에 정말 감탄했어요. 또 한국어를 배울 때 정말 기초부터 문법까지 하나하나 다 배워나가는데 그러지 않으면 자기는 연기를 할 수 없다는 거예요. 그냥 소리 나는 대로만 흉내 내는 일은 자기 능력 밖이라는 거죠. 자기가 선택한 방법이 이거다, 이게 아니라 이거 아니면 난 못 한다 하니까 할 말이 없잖아요. 선생님을 두 명 붙여서 한 명은 문법, 한 명은 발음을 맡아 하나하나 공부했죠. 한글도 우리보다 더 예쁘게 잘 써요(웃음).”
‘헤어질 결심’은 수상 사실을 떠나 박 감독에게 개인적으로 마음 한구석에 깊은 흔적을 남긴 작품이 된 것처럼 보였다. 영화를 본 사람들의 리뷰를 읽는 것도 이번 ‘헤어질 결심’이 처음이라고 했다. 관객 한 명 한 명에게 아주 개인적이고 내밀한, 자신만의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이 영화를 두고 박 감독은 “정말 사적인 영화”라고 정의했다. 딱히 관객들에게 “이런 교훈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목적 없이 그저 영화답게 기능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고, 그 시도가 성공적이었다는 게 박 감독이 가장 만족한 부분이었다.
“어떤 메시지도 없고 어떤 주제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게 만들었어요. 그냥 개인과 감정의 이야기, 서래라는 사람과 해준이라는 사람 둘의 감정의 이야기일 뿐이죠. 감춰져 있어서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어요. 그런 집중을 통해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을 때 느끼는 감정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이 영화를 보는 의미가 아닐까 싶어요. 그럴 때 슬픈 감정도 있고 아주 답답한 감정도 있고, 유혹을 느낄 때나 아주 우스꽝스러운 순간도 자주 있죠.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랑에 빠진 모습이기도 하고요. 그런 걸 개인적으로 음미해주셨으면 합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